그 "늑대"와 친구로 지내는 법 [犬友情法]

03.

 

 

처음에 지나왔던 그 계단은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것도 없는 언덕에 발을 딛으면, 양쪽에서 토끼발 같이 생긴 것이 나와 마주잡으며 계단이 만들어졌다. 그 다음 칸으로 내가 발을 하나씩 하나씩 딛을 때 마다 나의 속도에 맞추어서 양쪽에서 발이 나타나 마주잡으며 다음 계단을 만들어주었고, 내가 발을 떼면 다시 양쪽으로 나뉘어 사라졌다.

 

결이의 말에 따르면, 그 계단은 자신의 종족과 교류를 하던 인간들을 위해 만들어둔 오래된 계단이라고 한다. 계단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맡을 수 없는 인간의 체취를 구분하도록 만들어서 오작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는데,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작동했다. 결은 아마도 사라져버린 나의 아버지가 예전에 결의 종족과 교류했던 인간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아빠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보따리 장사를 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상인이었으니까, 수인들과 거래를 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결이의 말에 따르면, 인간의 체취는 호르몬과도 관계있어서 유전되기도 하는데, 나에게 흐르는 아빠의 피가, 아빠와 비슷한 어떠한 체취를 만들어낸 것 같다고 했다.

 

아빠의 젊은 시절은 인간들이 수인들과 제법 교류를 하던 때라서, 아빠의 체취가 등록되어있었을 거라는 결의 말은 정말 그럴 듯 했다. 특히 내가 태어날 무렵 수인들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인간들이 교류를 끊어졌었는데, 왠지 그래서 아픈 어머니를 치료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빠가 가난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생각되었다. 하지만 아빠가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으셨기에 그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결의 말대로 계단은 체취로 작동하는 것이 맞았던 것 같다. 그 계단은 내가 사춘기에 들어서기 전까지 계속 작동하였지만, 나중에 여자로서의 증거가 시작된 때부터는 작동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차 성징으로 바뀐 호르몬 때문에 나의 체취가 변한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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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이의 맹세를 받은 이후, 어린 시절의 나는 종종 계단을 통해 결을 만났고, 나의 신력이 최고 무녀의 눈에 띄어 무녀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거의 매일 잠깐이라도 만나며 그와 우정(友情)을 쌓아갔다.

 

어린 시절 결이가 갖는 의미는 나에게는 친구 그 이상의 것이었다. 결은 내가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다보면 결이는 인간사를 이해하는 남다른 통찰력을 보여줬다. 결이는 신전에서 여러 어른들을 모셔야하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어른들의 체면을 깎지 않으면서도, 곤란한 상황을 잘 빠져나갈 수 있을지 조언을 해주곤 하였다. 결이는 내가 다음날 그 일이 결이의 말대로 잘 처리가 되었다고 알려주면, 뿌듯해하면서도 재미있어했다. 늑대들 사이에서는 애시당초 어떤 서열이 잡혀있었기 때문에 나처럼 두 어른들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자신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실수를 했다면 어른들께는 납작 엎드려 얼른 잘못을 고하고, 아랫사람들에게는 사과하면 되었다.

결이는 늘상 나의 처우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위험할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와도 된다며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누군가에게 다정한 관심을 받아본 적이 별로 않았기에 결에 대한 나의 감정은 동경을 넘어서서 더 큰 무언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매일 결이를 만나던 나의 일상은 10살이 넘어가면서, 점차 바뀌어갔다. 시종관이 상급무녀들과 관련된 심부름도 나에게 맡기면서 몰래 들판을 지나서 가야하는 동산에 오를 여유가 사라져갔다.

 

“설아, 내가 그럼 들판에서 기다릴께..”

 

 

어느덧 자라난 결이는 늑대 마을이 아닌 밖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들판에서 만났다. 결은 시력이 좋아서 멀리 내가 들판을 걸어오는게 보이면 손살같이 달려나왔다.

나는 결이를 만나기로 한 날이면 늦더라도 꼭 들판으로 갔는데, 때론 시간이 늦어 달이 떠있는 밤에 만나는 날도 있었다. 늦은 밤이면 결이는 혼현을 드러내고 늑대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늦은 밤에는 늑대의 모습이 훨씬 다니기가 편하다나..

 

들판에 나란히 앉아 푹신한 털이 나있는 결이의 등에 기대여 있으면, 너무도 따듯하고 포근해서 그날의 우환을 모두 잊을 수 있었다. 무녀들 사이의 신경전에 피곤했던 어떤 날에는 만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런 날이면 가슴이 두근두근거려서 결이에게 들키진 않을지 신경이 쓰이기도 했다.

 

“설아, 너 체취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

 

“진짜..? 사춘기가 다가와서 그런 걸까..?”

 

“음.. 이정도면 이제 계단이 작동하지 않겠는데..?”

 

결이는 그 다음 날, 나에게 작은 표적이 달린 목걸이를 주었다.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내 체취를 담은 표적이야...”

 

표적이 있어서 여전히 나는 늑대 마을로 향하는 계단에 드나들 수 있었다. 결이가 준 표적은 왠지 그에 대한 증표같아서 나는 늘 몸에 지니며 소중히 여겼다.

 

...

 

 

그러던 중, 나는 최고 무녀의 눈에 띄게 되었다.

 

“너에게서 신력이 느껴지는 구나.. 언제 한번 시험해봤으면 좋겠는데...”

 

신력 시험을 앞둔 날, 마지막으로 나는 결이를 만나러 갔다. 그날은 왠지 모르게 결이의 표정도 굳어있었다.

 

“설아.. 나, 반려를 맞이하게 될 것 같아, 너와의 관계는 우정으로서 계속되겠지만, 이젠 족장 계승과 관련된 수업도 받아야하고.. 널 만나긴 이제 자주 만나긴 어렵겠지.”

 

”실은 나도 신력과 관련된 시험을 받게 되었어. 이제 정식 무녀가 되면 이 곳에 나올 수 없게 될 거야.“

 

우리는 그날 서로의 일을 축복하며,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설아, 어릴 때 너와 맺은 약속은 영원해. 가족이 없는 네가 갑자기 갈 곳을 잃고 머물 곳이 필요하거나, 위험을 피해야할 때가 생긴다면 언제든 찾아와.. 내가 널 지켜줄게..“

 

시험을 통과해 상당한 신력이 있음을 알게 된 나는 나의 신력을 갈고 닦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자기 전까지 정해진 규율을 따라야했고, 우리가 예상한 대로 우리는 한동안 헤어져 있어야 했다. 한참 뒤, 결이가 잘 있을까 싶어서 겨우 찾아갔을 때-아마도 2, 3년이 지난 뒤- 문지기는 그가 반려를 맞이했음을 알려주며 결이에게 안내해주었다. 늑대들은 한번 반려를 맺으면 그 반려를 배신하는 법이 없었기에, 반대로 친구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럽고 흔한 일이었다. 반려를 맞이 했다고 해도 이성인 친구를 만나는 것은, 한낱 우정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간사에서는 혼인을 한 이가 혼외의 이성을 만나는 것은 절대로 금지된 일이었기에, 인간인 나로서는 반려가 생긴 결이를 만나는 것이 영 불편했다. 

 

 

반려를 맞이한 결이는 여전히 마을 안쪽 큰 기와집에 머무는 것 같았다. 문지기는 결이를 처음 만났던 방으로 날 안내했다. 여전히 방 안 곳곳에 있던 달항아리가 있었지만, 그 곳에는 그의 반려를 뜻하는 듯한 매화꽃가지가 하나씩 꽂혀있었다. 달 항아리에 꽂혀있던 분홍빛 매화꽃가지는 하얀 달 항아리와 너무 잘 어울려서, 그녀와 결이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맞이하러 결이와 그의 반려는 홍미색의 저고리를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분홍빛 매화꽃을 닮아 너무도 순하고 착해보였다. 둘은 같은 손가락에 옥가락지를 하나씩 끼고 있는 것이 보이자 나는 왠지 비어있던 나의 왼손이 초라하게 느껴져 오른손으로 가려야만 했다.

 

불공평하다.. 무녀는 평생 결혼도 할 수가 없는데... 나는 평생 혼자 살아야만 하는데... 나는 신전에 들어오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무녀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질투심에 붉은 감정이 마음 속에 피어났다. 그에 반해 결이는 너무 안정되어보였다. 더 이상 결이를 가까이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그 날을 마지막으로 나는 더 이상 결이를 찾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나의 신력이 결이의 도력을 해칠 수도 있기에 이제 그를 만나는 것을 조심해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가 보고 싶어도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부디 그도 나를 보고 싶어하기를... 마음이 너무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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