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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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제법 추워졌다. 오랜만에 옷장 속에 묵혀두었던 먼지 쌓인 패딩을 꺼냈다. 옷장 안에서 얼마나 잔뜩 움츠리고 있었는지. 납작해진 패딩 솜은 옷장 밖 세상 공기를 머금고 부풀더니 꼬깃꼬깃 구겨진 단면을 펴냈다. 날아오는 먼지 덩어리들이 공중에 흩어진다.
아무래도 드라이세탁을 맡기는 게 나을지도... 매년 크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옷장을 갈아엎는 대공사를 치러야 한다는 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겨울을 앞두고 있을 시즌이 다가오면 패딩, 양털 재킷, 무스탕, 기모후드집업, 겨울 코트만 해도 우리집 옷걸이가 거덜 나는 건 한순간이다.
하루 종일 지난 계절의 옷을 집어넣고 끄집어내다 보면 잊고 있던 혹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의도치 않게 발견하곤 한다. 검정 목폴라 티. 오늘 건진 마지막 옷가지이다.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검정 목폴라 티는 어깨 라인으로 하얀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나는 손으로 대충 먼저를 탈탈 털어냈다. 그제야 본 모습을 드러내듯 짙은 검은색이 축 내려앉았다. 나는 자연스레 소매를 가져다 냄새를 맡았다. 킁킁.. 옷장에 오래 묵혀 있었는지 밀폐된 옷장의 쾌쾌한 냄새가났다.
그래, 남아있을 리가 없지. 조금은 아쉬웠나. 혹여나 잊고 있던 기억이 날것 같은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꼴이 참 우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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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 검정 목폴라티 입었네?"
"응?"
"항상 말하지만, 그거 잘 어울려"
"갑자기?ㅋㅋ"
박성호는 내 실없는 말에 멋쩍게 입꼬리를 꿈틀, 그의 곧은 목덜미는 그새 은근한 선홍빛으로 달아올랐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라며 운을 뗀다.
"아, 동아리 뒤풀이였나"
"응, 나 그때 오빠 처음 보자마자 한 눈에 반했잖아. 그때도 그 검정 목폴라 티 입고 있었는데"
쿡쿡 웃음을 뱉으며 지난 5년 전 추억을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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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새내기였던 여주는 동아리 뒤풀이에서 박성호를 만났다. 짓궂은 선배들의 술잔을 정신없이 받아내고 이미 반쯤 쥐 죽은 듯 테이블에 상체를 축 늘어 틀이었다. 햇병아리 새내기에게 지독하게도 마셔라 부어라 엎어라를 시전 한 결과다.
그때 낯선 팔 하나가 여주의 잔을 슥 가져갔다. 검은 색 목폴라티 하나 입고 무심하게 앉아 있던 박성호. 자연스레 여주의 잔을 비웠다. 안쓰러워 보였는지 여주의 잔을 슬쩍 가져가 자신의 빈 잔과 바꿔치기를 반복했다.
그때 여주는 처음 박성호라는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과대라서 유명한 것도 있었지만 왜 그렇게 학과 사람들이 경영학과의 미인이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 그러했다. 얇고 가는 눈매와 높게 솟은 콧대, 갸름한 턱선. 미인도에 그려진 여성이 생각날 정도. 만약 조선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기생오라비상으로 장안에 떠들썩 했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런 얼굴을 보고 어떻게 안 반해? 그런 사람 손에 꼽는다고 일단 김여주는 홀라당 넘어가 버렸지. 그렇게 김여주 불도저 아니랄까봐 새내기의 패기를 보여주었다. 박성호는 불같이 달려드는 여주를 당황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밀어내지 않았다. 그러게 왜 빈틈을 내어주었는지. 여주는 악착같이 밀고 들어갈 구석만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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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리치만치 부쩍 내 주변에 그녀가 있었다. 누구한테나 서스럼없이 다가길 좋아하는 아이라 생각했는데 유독 내 눈앞에 서성이는 게 마치 시골 똥강아지같다. 내 앞에서 쫑알쫑알 말이 많아지는 것도 조금 덤벙대는 것도.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내 시선은 그녀를 좇고 있었다. 신경쓰인다랄까. 이건 도무지 무슨 감정일까.라는 생각이 들새 없이 너는 내게 밀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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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을 함께하면서도 정말 종 잡을 수 없는 게 너였다. 좋아하는 디저트에 오두방정을 떨다가도 꼭 내게 한입을 건네주며 "이거 먹어봐" 내 반응을 살폈다. 내게서 맛있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자신의 디저트를 내 입속으로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헬스를 다니면서 디저트는 손에도 안대던 나였는데 네가 준 한입 두입에 그새 살이 붙었다. 절제하는 건 나름 나의 장점이라고 자부했는데. 어쩌다보니 네게 페이스가 말리곤 했다. 그 좋아라 흥얼거리는 디저트를 자꾸만 내게 밀어넣는지 도통 모르겠다. 뭐 이정도면 애교라고 생각한다만...
장마시즌이 다가올때면 바짝 긴장의 연속이었다.
밖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 와중 비가 내리면 곧바로 밖으로 뛰어나가 온몸이 흠뻑 젖도록 비를 맞아 오곤 했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말이다. 매일 아침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나로서 우산은 필수 대기에 있었는데 그녀에겐 있는 우산은 장식인지. 말릴 틈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녀였다. 그러면서 배시시 웃은 얼굴은 내 한숨을 쏙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렇게도 비 맞는 게 좋은가 찝찝해지는 건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다.
킁킁..-
여주는 내 등 뒤로 자신의 코를 박았다. 섬유 냄새가 좋다며 자주 내 옷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기 일쑤였다. 나는 저 똥강아지 어디 안 간다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여주는 유독 이 검정 목폴라티를 좋아했다. 내게 잘 어울린다면서 검정 목폴라를 입을 때는 매번 나를 꽉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러면 어느새 내 목폴라는 여주의 향기로 뒤범벅이었다. 달달한 복숭아 향기 딱 김여주 취향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체취 묻히려는 게 목적인 듯. 내 옷에 여주의 향기가 닿지 않는 게 없을 정도였다. 어쩌다보니 내 삶에서 김여주라는 존재는 내게 항상 존재하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물론 네가 내곁을 떠나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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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떠나기 열흘전, 그녀의 몸이 안 좋았다는 건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어릴적 병원에서 자랐다시피 외로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학교를 다니고 친구들과 추억을 쌓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사랑을 하는 그런 일상을 꿈을 꾸던 소녀였다. 다행히도 그 어린 소녀는 긴 병원생활 끝에 건강해졌다. 더 이상 병원 수액도 휠체어도 필요 없이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건강한 몸을 되찾았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검정고시를 치르고 원하는 대학에 붙었다. 그렇게 먹고 싶었던 디저트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으며, 늘 병원 침대 창밖에서만 바라보았던 빗방울의 감촉도 느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지긋지긋하던 병원 내 알콜과 역한 포드말린 냄새를 맡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제야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여주는 대학교를 다니면서 마음 맞는 친구가 생겼고 그토록 꿈꾸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김여주의 인생은 행복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옥죄어오던 병이 다시 도졌는 줄 모르고 말이다.
그녀에게 남은 기간 3개월, 그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가 없었다.
*
그렇게 그녀의 상태를 열흘 남겨진 채 알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하던 그녀에게서 배신감과 미움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와 그녀의 새빨간 거짓말을 알게되었다. 끝까지 제멋대로인 그녀는 내게 얼마만큼의 큰 상처를 내었는지 아물 기세 없이 상처는 계속해서 깊이 파고들었다.
"...장마래"
성호는 창문 커튼을 걷어주곤 여주의 침대 앞에 걸터 앉았다.
"...우산 가져왔어?" 여주는 힘없이 묻는다. 박성호는 "...아니" 고개를 저으며 여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웬일이래..~, 그 철저한 박성호씨가? " 여주는 농담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성호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마도 애써 짓는 미소이겠지만. 여주의 손을 살포시 붙잡았다. 늘 똑같은 다정함이 묻어나는 그의 손길에 여주는 울컥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붙잡았다.
쪽.-
성호는 가볍게 여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성호 나름의 여주를 달래는 법이었다. 여주가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미안함에 죄책감이 드는 것을 성호 또한 이해했다. 그 아픔을 덜 수 없음에 가슴이 미어지긴 하지만 그녀의 앞에서 티를 낼 수 없었다.
"...나, 냄새 많이 나?" 여주는 병원 냄새가 신경 쓰였다. 평소 깔끔 떠는 박성호에게 냄새나는 꼴을 보여주는 것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박성호는 내 물음에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아니, 안 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정하게 여주를 바라보는 눈빛은 진심이 담겨있었다. '왜 이렇게까지 나를 사랑하는지' 의문이 들 수록 박성호의 깊이가 여주에겐 쓰라리다. 저 사랑을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 수 있을까라는 미련.
여주는 박성호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그 미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맡고 싶었다. 그의 따스함을. 끝까지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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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은 금방이다. 그녀가 내 곁을 떠난 지도 3개월. 삶이 제기능을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 제대로 잠을 잘 수도, 무엇을 삼켜낼 의지조차 없이 그저 네가 보고 싶었다. 집안에 널브러진 네 물건 외에 네가 없는 텅 빈 방안은 먼지만 점점 쌓일 뿐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옷장을 정리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또 네 생각에 오래 추억을 되감았던 것 같다.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는 기억 속에 네 모습을 보았다.
너는 웃고 있었다. 그때 처럼 이 목폴라에 얼굴을 묻고 나를 와락 부둥켜 안았던 네 얼굴을...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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