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연애 모음

짝사랑짓거리

미리보기 (사실 구냥 제일 좋아하는 부분) 

Gravatar










짝사랑 짓거리



w. 스몰낫T






난 이렇게 생각했다. 사랑하면 원래 뭐든 다 해주고 싶은 법이었다. 헌데, 부장님은 죄다 거절이었다. 단 하나의 호의도 질색팔색 철벽은 무슨 콘크리트 벽을 단단히 쳐댔다. 그것도 나한테만. 7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초콜렛 하나도 안 받아주는 거. 

초콜렛은 당도가 너무 높다고 거절했다. 자기는 유전적인 당뇨 위험이 너무 커서 다크 초콜렛밖에 안 먹는데 그마저도 좋아하진 않는다고. 아메리카노는 쓰다고 싫어했다. 음~ 그거? 맛없더라. 왜들 그리 아아에 미쳐사는지, 원. 아무렴요…. 7년 전까지만 해도 늘상 자리 끝편에 놓여있던 밀크티는 물렸다고 싫어했다. 달달한 맛에 황홀감에 젖어들었던 건 다 지난 일이라고. 이제는 맛없다고. 프라푸치노는 비싸다고 별로라고 했다. 맛도 그저 그런데 너무 비싸게 받는다고. 그리고 또 뭐가 싫다고 했더라. 아무튼 간에 죄다 싫댔다. 


"그러니까 부장님. 혹시 사내연애가 싫으신 겁니까? 저 임용 다시 준비할까요?"

"임용 붙은 거 아니었어요?"


부장님의 눈알이 미미하게 커지며 빤히 돌아봤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참 순진하고 맑은 눈빛. 아 또 주책맞게 설렐 뻔. 큼큼. 아주 거세게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아뇨. 저 임용 떨어졌어요. 사실 임용고시보다도 여기가 더 간절했어요. 부장님 보려고 온 거니깐."

"그런 오글거리는 말, 근무 시간에 금지입니다."

"끝나고는 해도 되는 겁니까 그럼?"

 "우리가 퇴근하고도 봅니까?"

"아닙니까, 그러면?"

"글쎄요."

"부장님은 한결같이 쌀쌀맞네요. 난 한결같이 부장님 좋아하는데."

"원래 인간이 그래요. 대부분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안 끌려. 그러니깐 한연주 선생님도 그렇게 헤프게 사랑 주고 그러지 마요."


내가 사랑꾼이었으면 우리 부장님은 철학자였다. 종종 사랑이든 뭐든 고심할 만한 주젯거리만 던져주면 알쏭달쏭한 말들을 마구 내뱉었다. 사람은 참 유쾌하고 밝았는데. 그러니깐 소위 말해 '인싸'의 표본으로 2학년 부는 물론이고 왠만한 교직원들과는 친구 먹는 그런 사람이었는데 때때로 사차원적이었다. 몹쓸 예술가 기질. 예술 철학… 하위 갈래의 음악이건 미술이건 고전적이고 감성적인 것들엔 젬병인 내가 부장님과 어우러지지 못하는 걸림돌 중 하나였다. 

이런 적도 있었다. 때는 아아주 옛날로, 내가 갓 부임한 해로 부장님을 향한 마음이 지금 같지 않던 때였다. 정부장님이요? 제가 많이 좋아해요. 사범대 가겠다고 한 것도 정부장님하고 친해진 후였으니까. 딱 이정도. 인생의 롤모델, 최고의 선생님, 그리고 티끌만큼의 사심. -아주 조금이었다. 단지, 수민쌤하고 연애하면 좋으려나? 까지만 생각해봤으니까- 그때도 반가운 마음에, 거기다 같은 2학년 부로 배정받아 감사한 마음까지 더불어 이것저것 물어도 보고 주위에서 조잘거리는 건 한결같았다. 좀 가까워진 시기에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한 건 부장님이었다. 오케스트라 공연 보러 갈래? 멍청하고 미련했던 나는, 가면 무조건 졸거라며 호의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참 바보같았다. 지금이라면 오케스트라는 물론이고 중국에서 번지점프를 하러 가자고 해도 단박에 오케이였다. 아직도 땅을 치고 후회하는 그 날일이지만, 설령 내가 그날 이후로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더라도 두 번째 데이트 신청은 없었다. 그건 항상 내 몫이었다.

아무튼간에 과거의 울적했던 나날들은 각설하고. 


"그럼 제가 부장님 안 좋아하면, 그때는 저 좋아해주시는 겁니까?"

"지금도 좋아합니다."


아오, 저 무미건조한 답변. 진짜… 진짜 밉다. 사적인 감정으로요?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백번도 넘게 물어봤는데 정말이지 토씨하나 빼먹지 않고 똑같은 말을 읊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이었다. 그 어조와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너무 얄미워서 곱씹고 곱씹다보니 외워졌는데 정말 항시 똑같았다. 포스트잇에 적어두고 집가서 외우고 언제든 읊을 태세를 갖추는 게 분명했다. '동료로서 좋아하고, 제자로서 좋아하고. 사람으로서 좋아하고. 일 잘해서 좋고 책임감 있어서 좋고. 이만하면 나도 연주쌤 되게 좋아합니다.'

맞다. 죄다 맞았다. 부장님이 날 싫어하는 건 결코 아녔다. 우리는 밥도 둘이 먹으러 내려갔다. 원래 부장님은 꼭 함께 먹는 선생님들이 따로 계셨는데 그 중 가장 친했던 한 분은 육아 휴직을 내시면서, 또 다른 선생님 한 분은 기깔나게 사직서를 휘갈겨 쓰고 퇴사하시면서 어쩌다보니 우리는 같이 밥 먹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우린 서로 좋아했는데(다른 점이라면, 나는 좋아함으로 그치지 않았으며 사랑했다) 사귀지 않을 뿐이었다. 나의 빈번한 고백에 가당찮은 이유를 대며 거절한 정모부장님 탓에.

4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자 부리나케 교무실로 올라갔다. 이래서 젊은 피는 고생하는 법이었다. 무슨 일주일에 사흘이 4교시 수업이냐고! 아, 부장님 오늘 밥 완전 맛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그럼에도 기분이 좋아 절로 해맑게, 참 애같게 물어버렸다. 이래서는 교복 입고 교무실 찾아오던 때하고 다를 게 없었다.


"넌 그런 거는 되게 잘 알아오더라."


부장님의 말에 내가 주위를 힐끔거렸다. 와, 무서운 사람들. 고새에, 고작 3층 오른쪽 끝에서 4층 왼쪽 끝까지 종종 걸음으로 오는 새에 다들 부리나케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비웠다. 어쩐지, 부장님 얼굴이 편해 보이더라. 나는 연신 고개를 내두르며 말했다.


"에이, 그건 쌤이 4교시 수업을 안 들어가봐서 그래요. 애들 얘기의 8할이 급식 얘기에요. 특히 오늘처럼 맛있으면 더더욱."

"뭘 안 들어가봐. 딱 너 가르칠 때만 해도 내가 윤리과 막내였는데. 빡세지?"


부장님이 짖궂게 웃었다. 저렇게 웃을 때 눈을 찡그리고 아주 귀엽게 웃는 버릇이 있었다. 장난기 가득 어린 눈빛은 오랜만이었다.


"어우… 완전. 저 지금 배고파서 죽을 거 같아요. 진짜로."

"연주 살리러 가야겠네."


와. 미쳤다. 두근두근. 오늘 심장박동 최고치 또 이렇게 갱생했다. 대사 하나하나가 이리 주옥같아도 되는 거냐? 우리 이정도면 로맨스 코미디 영화 하나 정도는 찍어도 되는 거 아닐까? 풋풋하고 설레고 낭만적이고 운명적인 거. 내 이리 호언장담하건데, 선생님의 여태껏 인생에도 우리의 남은 창창한 앞날에도 이보다 질기고 깊은 인연은 없을 것이었다.

때때로 이것이 우리의 연애가 성사될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매번 장난스런 고백으로 퉁치고 사랑을 논해도 한연주가 진지빨고 고백하지 않는 이유. 짙음을 머금은 하늘색이 예쁜 거였다. 겉보기에도 빠져도 허우적거려도 뭐든 옅은 게 좋은 편이었다. 사랑이 너무 깊으면 빠지기 바쁘게 숨쉬기 버거워져서 주로 얕은 물에서 노닥거리는 편. 대충 부장님을 따라잡으면 이랬다. 사랑에 관한 심도있는 고찰. 한연주로 말하면 그냥… 잃고 싶지 않아서. 얼렁뚱땅 가벼운 이유가 전부였다.


"쌤 오늘 저야 있어요? 없으면 그 자리 제가 꿰차도 돼요?"


부장님은 대꾸를 않았다. 아주 미워죽겠다. 저런 부장님 뭐가 좋다고


"아마도 그럴 걸?"


아 좋아서 미치겠다. 좋아 죽겠다. 뭐가 좋냐면, 그걸 굳이 하나만 말해야 할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죄다 좋았다. 종종 꾸안꾸 룩으로 끼고 오는 뿔테 안경도 미치게 좋았고 무더운 여름이면 질끈 묶은 머리 사이로 삐져나온 잔머리도 무지막지하게 좋았다. 때때로 좋은 내색 싫은 내색 안할 때 쓰는, 묘하게 돌려말하는 화법도 좋았고(딱 방금이 그랬다) 분필로 판서하는 앙증맞은 글씨체도 좋아죽었다. 참 사람을 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나. 근데 진짜 사람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저랑 영화보러 가요, 그러면."

"요새 뭐 재밌는 거 해?"

"쌤 얼굴이 재밌어요."

"근무 시간에 되도 않는 드립 금지라고 했는데요. 한연주 선생님."

"진심도 드립이라고 하나요? 요즘에는? 그거까진 몰랐네~ 뭐… 재밌는 거 없으면 그냥 술이나 마시러 가시죠?"

"야, 나 숙취 이틀씩 가서 안돼."

"그러니깐 금요일에 마시자고 꼬시는 거죠. 쌤을 제일 잘 아니까."


하여튼 못말려. 이건 부장님 속마음이다. 어떻게 아냐면 그냥, 그냥 잘 알았다. 들리진 않았지만 내가 읽었다. 백기 펄럭이는 부장님의 저녁은 그렇게 냉큼 내가 차지했다.






"2차 갈거죠? 그죠?"


어리광이 잔뜩 묻은 말투에 확신이 없는 물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2차고 뭐고… 이미 정신은 알딸딸해져 있었다. 레스토랑에서 와인 4잔은 삼갔어야 했다. 주량이 퍽 딸리진 않았지만 우리 부장님은 술이라면 손사래를 쳐도 막상 입에 들어가면 말끔한 정신으로 꼴깍 잘 넘겼으니깐. 부장님 페이스 맞춰서 4잔 째 와인을 따르는 소리를 감상하며 직감했다. 말렸다. 역시나, 함부로 나대지 말걸. 몰려오는 후회에 자책을 거듭하며 옆자리에 앉은 부장님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지금 너 데리고 술집 또 들어가면 그건 거의 범죄야. 알긴 해?"

"그럼 우리집 갈래요?"

"뭐 꼬시는 거야 이건?"

"그런 거 같은데. 좀 넘어가주면 안되나…."


발음이 어눌한 것도 알았고 자꾸 실실 새어나오는 웃음이 참 촌스럽다는 것도 뻔히 다 알았다. 이런 추태 보이고 싶진 않았는데. 결국 대리기사의 재촉에 찍힌 내비게이션 속 목적지는 우리집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부장님이 이 얼토당토않는 유혹에 넘어갔다는 뜻은 아니었으며 단지 배웅이었다. 너 집 안데려다주면 사고칠 것 같아서.

……젠장. 분명히 의도는 그랬다. 그러니깐 부장님의 호의였으며 비틀비틀 알아서 걸어가게 냅두다가 화라도 입는 것보다야 본인이 바래다주는 편을 선택했던 것.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차라리 나를 길거리에 내다 버리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혼미한 정신으로 집에 못 찾아가도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편이 나았을 거다. 그쪽이 오히려 사고도 안치고 얌전히 귀가하지 않았을까. 

그날밤 사고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녔다. '우리'였다. 



*


우린 주말 내내 연락 한 번을 않았다. 토요일 벌건 대낮에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부장님은 떠난 지 훌쩍 넘었을 시간이었으며 나는 혼자 해장국이나 들이키러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순댓국에 밥을 한웅큼 말아먹으면서도 소금을 치면서도 머리는 줄곧 엉뚱한 곳을 헤메고 있었다. 부장님 눈이 그렇게 예뻤던가. 목소리가 그렇게 좋았던가. 그리고……. 아니다. 그냥 부장님 생각만 종일 했다. 4시에 시작한 토요일에도, 일요일에도 하루종일 그 생각만 줄곧.

출근길에 꽃가지 하나를 꺾었다. 당장 머릿속의 부장님은 윤리과인데 내가 이짓거리를 해도 되나? 아무튼간에 그랬다. 크게 미워하진 않겠지. 처음이었다. 난 개미 한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애였다. 정말 유치하게, 마치 초등학생 때 애들과 하던 짓거리처럼 꽃잎 한장을 뜯어내며 작게 읊었다. 아는 척 한다, 안한다. 한다, 안한다… 두번째 꽃에는 다른 의미를 부여해서는 다시 헛짓거리를 했다. 사귄다, 안사귄다. 사귄다, 안사귄다…. 

내가 이리 일찍 출근하는 건 오로지 부장님 때문이었다. 당장 묻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아서 입이 근질근질해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으니깐. 문자로 얘기하기에는 좀 거시기한 얘기들. 전화로 나누기에는 조금 부끄러운 것들. 일찍이 출근해서는 부장님 자리만 힐끔거리며 한참 간을 재다가 아주 조심스레 단둘이 있는 교무실에서, 부장님 쪽으로 의자를 끌어 다가갔다.


"부장님 우리 사귀는 겁니까."

"누가 그러는데요?"

"아니에요? 이래도 우리 연애 안하는 겁니까."

"네."

"왜요?"

"왜요는 뭘 왜요입니까."

"금요일에 잔 거 별로였습니까."


부장님의 눈알이 토끼같이 휘둥그레졌다.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놀라든 기쁘든 항상 표정에 잘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부장님은. 화도 아주 묵직한 분위기로 압살해버리는 게 대다수였고 조곤조곤 팩트로 조지는 편이었다. 그런 부장님의 얼굴에 감정이 이렇게 뻔히 들여다보이기는 수년 만에 처음이었다. 나 제법 부장님에 대해 모르는 게 많구나. 갈 길이 머네. 고 동그랗던 눈도 금새 평소처럼 돌아왔다. 아주 차분한 말투로 어색하게 큼큼 거리지도 않고, 아주 무난하게 동문서답이었다.


"근무 시간에 잡담 그만하고, 가서 일 보세요. 보니깐 야근 신청까지 하셨던데 오늘 일 많은 거 아니세요?"

"……네. 맞습니다. 저 오늘 무지하게 바쁩니다. 수고하세요. 그럼."


안사귄다고? 이래도?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저 의연한 얼굴의 속내를 도무지 읽어낼 수 없었다. 부장님한테 금요일밤은 정말 사고였습니까? 한마디 더 얹고 싶은 걸, 마침 그 타이밍에 기분 좋게 출근하는 최선생님 덕에 겨우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가서 일 보세요'라니?! 이 상태로 일에 집중이 되면 내가 부처나 하고 있지 왜 속세에 찌들어 살겠냐고. 말이 돼? 아니, 정말? 정말 단 한치의 마음도 미련도 없이 실수로 퉁치는 거야? 모른 체 하고 살자는 건지 뭔지. 하루종일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시험을 1주 앞두고 진도를 모두 끝마친 상황 속에서 남은 선택지라곤 자습이 전부였다. 그 적막함 속에서 평소였으면 책이라도 읽었을 것을, 그냥 멀뚱히 시계만 쳐다봤다. 간당간당 초침을 눈으로 쫓으며 점심시간만을 기다렸다. 부장님이 오늘도 어김없이 나와 함께 밥을 먹을지는 미지수였다만 그럼에도 종이 울리기만을 고대했다. 평소보다 잠짓 느린 걸음걸이로 내려간 교무실은 역시나 썰렁했고, 부장님 혼자였다.


"왔어?"

"오늘은 밥 별로래요."


부장님 따라하고 있는 거였다. 부장님은 눈치조차 못 챌 정도로 아주 유치찬란하게 은은히 비꼬면서 동문서답. 누군 제대로 대꾸해줄 줄로 아나.


"안 먹겠단 소리는 아니지?"

"네. 가요. 밥 먹으러."


정말 이대로? 부장님은 금요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아니 그냥 별 얘기가 없었다. 원래도 먼저 말 붙이는 건 주로 내쪽이었는데 그런 내가 잠잠하니 크게 떠들석한 분위기는 아닌 것이었다. 부장님이 종종 던져오는 화제는 시답잖은 게 전부였다. 업무 관련해서도 물어봤고, 또……. 그게 전분가. 아무튼 별로 기억도 안나는 그런 것들. 내 머릿속은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해서 솔직히는 뭐라고 말하는지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부장님은 참 속편한 인상이었다.

그나저나 말이다, 나란히 걸을 땐 몰랐는데 이렇게 마주보고 앉으니까 미칠 거 같았다. 숨도 제대로 못 쉬겠고, 붉으락푸르락 안달 난 귀를 가리기 바빠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랐다. 부장님이 고개를 들어 말이라도 걸면 이미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펑하고 폭발해버릴 것만 같았다. 금요일 밤의 애정행각이(애정이란 말이 붙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다만, 행각이라 칭하기엔 저급하여) 아른아른했다. 얼굴만 보면 심장이 두근두근거렸다. 이거야 말로 진짜 x됐다. 처음으로 부장님이 야단스럽게 말하지 않는 게 너무 다행이라고 안도하며 꾸역꾸역 밥만 집어삼켰다. 그마저도 정신줄 놓고 멍때리던 게 줄곧이라, 그냥 어영부영 자리만 지키다 부장님이 일어날 때 같이 일어났다.

부장님은 여전히 뻔뻔하게 굴었다. 내 이 심란한 속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날 정말 티끌만큼도 좋아하지 않는 건지. 여태껏 미뤄뒀던 걱정이 한 번에 물밀듯 밀려와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금요일밤이 실수였다고 하면? 미안하다는 소리가 부장님 입에서 나오면 난 어떡하냔 말이다. 그땐 마음의 상실감은 물론이고 도무지 부장님의 얼굴을 다시 볼 용기가 설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여태껏 미뤄두었던 근심이란 건데. 엄지손톱을 입가까지 가져갔다가 물기 직전에 말았다. 아, 이 버릇 고치라고 그렇게 쏘아대던 것도 부장님이라. 손이 얼마나 더러운 지 모르냐고. 참 나. 그러니까 그런 애정 어린 걱정들은 다 뭐였냐고. 내가 단지 제자로만 이뻤던 겁니까?

문제 출제하는 것만으로도 골머리를 싹히는데 옆의 부장님의 손짓 하나하나가 신경을 건드려 몸은 두배로 지쳤다. 귀신같은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의자를 끌어 감췄다. 아까 밥이나 제대로 좀 먹을걸. 땅이 꺼져라 후회하며 우측 하단의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어느덧 6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기필코 7시 전에 끝내고 가려했는데 글렀다. 

다시금 심기일전하여 간신히 끌어모은 정신력을 와장창 깨부순 건 다름아닌 부장님이었다. 옆에서 부스럭거리더니 이 처량하고 심란한 나를 두고 냉큼 퇴근이었다. 윤리과는 시험 출제 다 하셨나봐요. 속편해 죽으시겠네요, 아주. 교무실에 사람만 없었어도 얄궂게 한 마디 쏘아줄 작정이었는데 북적거리고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이목을 끌 깡따구는 없었다. 인사로 배웅하기에는 내 체면도 죽고 밉기도 하고 심란하기도 하고. 이 모든 이유들을 제치고(그렇다고 하자) 바빠서 그냥 부장님의 가벼운 발걸음을 못본 척 무시했다.


- 문제 최종 검수하고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엔터키가 이리도 상쾌하게 쳐질 수 없었다. 하필 중간고사 때 물리과 재시험만 두 번을 치뤘던 터라 신중에 신중을 가한 작업이었다. 눈이 빠져라 읽고 또 읽었도, 자꾸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잡생각 탓에 같은 문장만 스무번 씩 읽어댔다. 뻑뻑한 눈에 인공 눈물을 쥐어 짜넣으며 마침내 컴퓨터를 껐다. 8시가 간당간당했다. 아… 배고파 죽겠다. 빨리 시험이나 끝났으면 좋겠네. 이거 하나만큼은 학생일 때랑 다름이 없네. 부장님 생각은 저 멀리 집어던져두고 이런저런 생각들로 빈틈을 메꿔 가며 외투를 걸쳐입었다. 아직도 북적한 교무실을 살금살금 빠져나오며 저녁 배달 메뉴 궁리나 해대던 참에. 진짜 기막힌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

​한참을 핸드폰을 붙들고 우두커니 서서 고민했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난 매몰찬 거절도, 실수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차마 들을 용기가 없었다. 어차피 들을 말이라고 하더라도 할 수 있는 데까지 미루고 또 미루고 싶었다.


"섭섭하다? 뭔 생각하길래 가만히 서서 전화를 안 받아?"

"어? 네?"


미친. 깜짝아. 뒤를 돈 순간에 딱 마주친 두 눈에 내 눈은 갈팡질팡 사방을 헤멨다. 아 미치겠네. 또 주책맞게 예쁘다. 하필 이런 날에 존나게 예쁘시네요.


"어 근데 부장님 퇴근 하시지 않으셨어요? 왜…."

"저녁 드셨어요?"

"네? 아니요. 아직. 아니, 근데…."

"그럼 저녁 먹으러 갑시다. 내가 연주쌤 집으로 가자고 해도 되는 건가."


이게 무슨 상황인데? 그냥 아무것도 이해가 안됐다. 퇴근한 줄 알았던 부장님은 말짱히 여기 있고, 아니 그리고. 네? 집이요? 한참을 느린 반응이었다. 부장님은 대꾸는 않고 웃었다. 그냥 아주 이쁘게. 그냥 여름을 한가득 담아놓은 사람처럼 싱그럽게. 아니, 이게 아니라. 일단 차타서 얘기할까요. 부장님.


"연주쌤 차 가져왔어요?"

"저요? 네."

"그럼 그걸로 가요. 나 차 안가져왔어."



*

한참의 적막을 깬 건 나였다. 평소엔 그 조용함이 썩 나쁘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1초도 견디기 버거워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았다. 막상 얼굴을 보니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속으론 이미 수십 번의 고뇌를 거쳤다. 온갖 경우의 수를 계산해보면서, 나의 고백에 대한 부장님의 답변을 예상했다. 속으로는 그 예상 속 수만가지 상황을 가정하면서 최대한 어른스럽게 반응할만한 리액션을 찾아내고 있었다.


"부장님한테 금요일은 실수였습니까."

"너한테는 뭐였는데."

"고백할 핑곗거리."


거기까지 반사적으로 말하고 나서야 나는 또 부장님의 말장난에 말려들었다는 걸 인지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이미 뱉은 말 멈추는 게 더 우스워서 그냥 말을 이었다.


"저 쌤 되게 좋아해요. ……저 연애 상대로는 영 아니에요? 쌤이 그냥 실수였다고 하면, 그냥 그런 걸로 할게요. 그냥 모르는 척 아무일 없었던 척 그렇게 살아요, 우리. 어차피 아무도 몰라."

"아니. 기다렸어. 너 고백."

"예?"


족히 백가지 이상의 답변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응대를 계산해왔음에도, 나의 수고스러운 계산을 완전히 벗어난 말에 어색한 추임새가 툭 튀어나왔다.


"기다렸다고. 너가 고백할 때까지."


눈만 말뚱말뚱 굴렸다. 그럼 내가 여태껏 한 고백은? 그건 뭔데?! 하루에도 좋아한다는 말만 수십 번, 데이트 신청은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꼬박꼬박. 가끔 사귀자고도 했고 누가 부장님 좋아하는 시선이 티나면 죽어라 질투의 눈빛을 쏘기도 했는데. 우리 부장님이 그걸 눈치 못 챌 사람이 아닌데. 영 엉뚱한 대답에 머리가 핑그르르 돌아갔다. 팽팽거리는 소리가 워낙 커서 어쩌면 부장님 귓속까지 파고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고뇌를 멈추지 않았다.


"너 처음이잖아. 그렇게 걱정 근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고백하는 거. 너가 언제 어른 되나, 난 그거 기다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