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 뒤에 서 있을 때면 세상이 잠깐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바쁘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은 유리창 밖을 스쳐 지나가고, 나는 이 안에서 매일 같은 일을 반복했다. 메뉴판을 닦고, 커피를 내리고, 잔을 정리하고, 혼자 남은 공간에서 음악을 틀었다가 끄기를 반복하는 일.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사운드트랙도 처음 며칠간만 좋았고, 지금은 건조한 벽지처럼 배경이 되었다.
나는 그 배경 속에서 그냥 서 있는 사람이었다.
오전 10시 반이 지나면 늘 그 손님이 왔다. 처음엔 우연인가 했다. 두 번째는 습관 같았고, 세 번째부터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검은 모자에 헐렁한 후드, 무표정한 얼굴에 이어폰. 항상 같은 자리, 창가 끝쪽에 앉는 것도 같았다. 주문은 블랙. 한 번도 바뀐 적 없다. 포인트 적립을 물어본 적도 없고, 이름을 남긴 적도 없다.
대화라 해봤자 ‘아메리카노요’ 한 마디면 끝이었다. 계산이 끝나면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돌아서 앉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사람만 오면 공간의 온도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정국. 그가 그렇게 불리는 건, 한 번은 다른 손님이 이름을 부른 적이 있어서였다. 아니면 내가 모르게 흘린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정국이라는 이름은 생각보다 쉽게 내 입에 붙지 않았다.
그냥 ‘그 손님’. 내가 굳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었고, 그도 굳이 말할 것 같지 않았다.
그날도 그는 같은 시간에 왔다. 날이 조금 더웠고, 나는 냉커피를 서둘러 내리고 있었다. 손등을 식히려고 얼음 물잔을 잠깐 쥐고 있을 때, 그의 시선이 문득 내 손끝에 닿았다.
짧고 무표정한 눈길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시선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마치 ‘괜찮아요?’라고 물은 것 같았다.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느껴졌다.
“아메리카노요.”
그는 여전히 짧고 간결하게 말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버튼을 누르고 컵을 준비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유독 손이 말을 안 들었다. 얼음을 놓치고, 뚜껑을 헛짚고, 시럽을 하나 더 꺼낸 것도 모른 채 컵에 꽂으려 했다. 그는 잠깐 멈추더니 컵을 받으며 말했다.
“오늘은 시럽 하나 더 넣으셨네요.”
나는 놀라서 시럽을 확인했다. 정말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시럽을 빼려 하자 그는 그냥 고개를 저으며 컵을 받았다. 말은 없었지만, 그 한 마디로 나는 다 들킨 기분이었다. 시럽을 실수로 넣은 것도, 요즘 내가 자꾸 흐트러진다는 것도, 그래서 이 손님이 올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는 것도.
그가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도 나는 그의 등을 가끔 훔쳐보았다. 딱히 뭘 하는 것도 아니었다. 컵을 잡은 손은 늘 조용했고, 이어폰 줄은 살짝 흔들렸으며, 눈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햇빛이 비스듬히 그의 턱선을 감싸고 있었고, 그 밑으로 스치는 그림자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대단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조용한 뒷모습 하나에 내가 왜 이리도 집중하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원래 기억을 잘 안 한다. 일부러 그렇다. 예전엔 무언가를 오래 기억하는 게 좋은 줄 알았다. 노래 한 곡, 멜로디 한 줄, 누가 했던 말 한 마디를 꼭 붙잡고 살았다. 그렇게 붙잡은 기억들이 나중에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꿈을 좇는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대체로 박수를 쳐주지만, 그 꿈을 내려놓는 순간엔 고개를 돌린다. 나도 그렇게 돌려진 고개를 몇 번 겪고 나서야 깨달았다. 잊는 게 편하다는 걸. 붙잡지 않는 게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그래서 그 이후로는 마음이 가는 일에도, 사람에게도, 감정에도 오래 머물지 않기로 했다.
그런 내가 지금, 매일 오는 손님 하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그가 말 한 마디 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자꾸 신경 쓰이고, 내가 만든 커피를 매번 어떻게 마시는지 관찰하게 되고, 주문받는 짧은 순간에 괜히 손이 떨리는 것도.
이건 내가 원래 하던 방식이 아니다. 좋아하면 지는 거라고, 오래 생각하면 아프다고, 스스로 세뇌하듯 외워오던 말들이 그 앞에선 너무 쉽게 무너져 내렸다.
“이 노래 좋네요.”
정국이 처음으로 내게 했던 두 번째 문장이었다. 컵을 반쯤 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이어폰을 귀에서 뺀 그는 잠시 스피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내가 틀어놓은 건 예전에 만든 자작곡 데모였다. 누가 줬는지 기억은 나지 않았고, 오래된 파일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다시 듣게 된 것뿐이었다. 그런 곡을, 그가 듣고 좋다고 말했다.
나는 괜히 허둥대며 대답했다.
“그냥... 예전에 받은 거예요. 어디서 났는지도 기억 안 나요.”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난 아직도 듣고 있어서요.”
말이 끝나고 나서, 그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종이 흔들리는 소리만이 공간에 남았다. 나는 정지한 듯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아닌 듯 지나간 짧은 문장이, 이상하게 깊게 박혔다. 마치 나 혼자 무언가를 잊고 있었고, 그 사람은 계속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날 이후, 나는 음악을 다시 틀지 못했다. 아무 노래도, 아무 멜로디도 괜히 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그를 잘 모르는데, 그는 나를 아는 것 같았다. 나는 하루하루를 넘기기 바빴는데, 그는 오히려 그 하루를 붙잡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날 처음으로 알았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있는 사람도
완전히 다른 시간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