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여름철 슬픔

네 웃음은 나를 위해 간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올라가는 입꼬리가 매번 내게 날을 세워 난도질을 해댔다. 넌 무엇이 위험한지 모르고, 무엇이 사랑인지 모르며, 무엇이 우리인지 몰랐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런 네 눈빛이 흔들리는 걸 알면서도 네 곁을 지켰다. 그럼에도 너만큼은 별처럼 살길 바랐으니까.



하나, 둘.
하나, 둘.



수를 읊조리던 네 목소리가 여전히 내 귓가를 울린다. 하나, 둘. 넌 하나에 눈을 감았고, 난 둘에 눈을 감았다. 난 하나에 눈을 감았어야 했다. 넌 내게 둘에 감으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난 둘에 감았다. 넌, 언제나 하나에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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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슬픔  |   26





매서운 겨울 바람이 머리칼을 휘감았다. 이맘때가 되니 칼바람에 의해 산발이 되어가는 머리를 어떻게든 지켜내려 노력하던 이월의 내 모습이 또다시 떠오르게 된다. 열일곱 무렵이었다. 어느 중학교의 졸업식이 끝난 하굣길, 온통 꽃다발 뿐이던 겨울의 끝자락. 난 그곳에서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넌 그곳에서 꽃다발을 팔고 있었다.



장미 가시에 긁혀 상처투성이인 손과, 꽃다발을 쥐고 있는 수많은 손들 사이에서 난 괴리감을 느껴 덜 정리된 내 꽃다발의 장미 가시에 일부러 손을 스쳤다. 내 손 끝에서 장미가 피어났다. 너의 손에 담긴 장미들도 너에게 행복한 존재일지 궁금했다. 그게 너와의 첫 만남이었다. 달큰한 향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



철없이 졸업식에 와달라고 말했던 나의 유년은 부모에게 꽤나 버거웠던 것 같았다. 잠시 자리한 뒤, 꽃다발을 건네주고는 친구들과 놀러 가라며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떠났다. 내 손보다 전화기를 더 오래 잡고 있는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식엔 그 누구도 나와 함께 있지 않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래서 너에게 말을 걸었다.



대뜸 걸어오는 인사에도 웃으며 답해주던 너는 고립된 나를 건져내 주었고, 그 누구보다 해사한 웃음을 지을 줄 알게 해주었다. 그래, 그게 자그마치 9년 전이다. 스물여섯의 나는 여전히 열일곱의 우리를 그리워 한다. 너는 이러지 않았으면 한다. 내 사랑을 알고도 떠난 너만큼은, 내 마음 같은 건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



***



스물, 우리가 함께 살던 찬란한 순간들의 연속. 내 돈으로 마련한 집이라 넌 늘 불편해 했었다. 부담스러워 하는 눈빛이 신경 쓰였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네‘가 아니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었다는 걸 눈치 챘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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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해.”

“너 같으면 네가 말하는 대로 가만히 놀기나 하면서 살 수 있겠어?”

“내가 널 사랑하니까 같이 사는 거잖아, 네가 불쌍해서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건데.”

“나도 널 사랑해. 그래서 집안일이라도 하려는 거라고.”

“그럼 약이라도 바르던가, 밴드도 안 붙이고 설거지를 하면···! 난 너한테 뭘 바라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어···.

”네가 월세도 다 내. 네가 식비도 내. 매일 밤 지친 얼굴인 널 안아주는 내 마음은 어떨 것 같은데? 네가 이럴 때마다 너무 힘들어, 정국아.“

”그래도,“

”네가 아무리 날 귀하게 대해도 아득바득 사는 개미들 천지인 이 세상에서 귀해봤자 얼마나 귀해지겠어.“

”······“

”이 정도는 해야지, 염치가 있으면.“

”난 네 갑 같은 게 아니라···.“

”나도 네 을 같은 건 아니야. 사랑하는 만큼만 하자.“



그래, 넌 사랑하는 만큼만 하자고 했다. 근데 그건 알고 있어? 난 널 사랑하는 마음 같은 건 잴 줄도 몰라서 모든 걸 너한테 퍼주고 있잖아.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고. 여전히 상처투성이인 네 손이 우리 집을 가꾼다는 사실마저도 속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데, 며칠 되지 않아서 날 따라 일을 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또 대판 싸웠었다. 내가 그 애에게 유일하게 남은 재산을 지켜줬어야 했으니까. 그걸 지켜줄 사람은 네 삶에서 오직 나뿐이었다.



내 부모님은 내게 사랑 대신 힘을 주셨다. 꿈을 꿀 수 있는 힘을. 그 덕에 적당한 대학에 들어가 알바를 하며 너와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고. 나와 달리 넌 열다섯부터 꽃집을 운영했다. 네 작은 꽃집은 우리 집에서 너무 멀어 새벽마다 이르게 버스를 타고 떠나야만 적절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기 외곽에 위치한 네 꽃집은 너의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재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너무 일찍 떠나신 탓에 넌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꽃집을 운영했었다며 아쉬운 눈빛으로 말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학교를 다녀오면 늘 나에게 오늘은 뭘 했냐고 물었다. 처음엔 모든 일을 다 얘기해 줬지만, 매일같이 물어보니 점점 힘이 들어 뒤로 갈수록 제대로 말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떠올려 보니 왜 너에겐 미안한 일뿐인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있지, 난 주로 종일 네 생각을 해. 너, 웃음, 꽃, 집, 빨래, 침대, 또 다시 너, 배게, 눈물, 그리고 또 다시 너, 내 앞에서 우는 너. 뒤로 갈수록 점점 슬퍼지는 건 내 의지는 아니지만.



***



스물둘, 군대를 다녀왔을 무렵. 군기가 바짝 잡혀 아침잠도 줄어버린 탓에 그전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일을 하나씩 하기 시작했다. 너보다 빨리 일어나 잠든 네 모습을 바라보는 것, 매일 아침 네가 나에게 해주던 간단한 아침들을 내가 준비하는 것, 가면 갈수록 이른 시간에 울리는 네 알람을 몰래 꺼주는 것. 그때마다 어둠이 드리워지는 네 얼굴을 난 알아차리지 못했다.



“일어났어?”

“또 네가 준비했네··· 미안해.“

”뭐가 미안해, 내가 일찍 일어난 걸.“



억지로 짓는 웃음이 내가 만든 아침밥을 삼켰다. 난 또 알아차리지 못하고 네 손가락만 바라봤다. 가시에 긁힌 손가락보다 더 아픈 게 네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네가 너무 웃어대는 탓에 매번 의구심을 품다가도 넘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난 이때를 떠올릴 때마다 네가 내게 묻던 것처럼 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난 너를 사랑했던 걸까, 우리를 사랑했던 걸까. 너보다 우리가 우선이었으면 안 됐는데. 네 얼굴이 점점 흐릿해져 갔다.



스물다섯, 내가 회사에 취직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던 평화로운 나날들. 오후 7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네게 받는 입맞춤을 위해 하루를 불같이 살아가던 1년 전의 나는 더 이상 너를 연민하지 않았다. 스물의 나는 내가 널 사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사랑보다 연민이 더 컸던 것 같다. 스물의 네가 말했던 자신을 불쌍하게 보지 말라는 말이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 넌 그때부터 내 사랑을 알고 있었다. 그게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열일곱, 내가 너에게 사랑을 말한 첫 눈빛을 지나, 스물다섯, 우리의 사랑이 8년째 되어가는 해. 넌 아직도 나를 사랑하니? 네 눈가에 번진 미련은 언제부터 없었던 걸까. 넌 내가 없더라도 괜찮은 걸까. 우리의 사랑이 이렇게나 길고 질겼는데 넌 너무 고요하고 적막하다. 고즈넉한 말투였다. 팔월의 열대야였다.



"그만할까?"

"왜···?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게."

"내가 꽃집 판 거 알고 있었어?"

"뭐···?"

"꽃 같은 거 쥘 낭만은 스물넷에 끝났거든. 너 출근할 때 나도 알바 나가서 돈 벌었어."

"하지 말라니까 기어코,“

"너랑 지내는 게 너무 힘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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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네가 아침에 일어나서 밥까지 할 때는 내가 널 위해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해 차라리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어."

"난···."

"너만 날 사랑하는 게 아니야, 정국아. 나도 널 사랑해. 근데 자꾸 넌 내 사랑을 거부하고 절제하면서 네 사랑만 받게 했잖아. 네 사랑은··· 나한테 너무 무거워."

“······.”

"그래서 그만했으면 좋겠어. 그만해줘. 나 좀 살려줘, 응?"



언젠가부터 널 생각하면, 그 끝이 눈물로 가득해졌다. 출근하면서 드는 네 모습에도 넌 울고 있었고, 점심시간, 상사에게 꾸중을 들을 때, 퇴근할 때에도 그랬다. 어떤 순간에서도 넌 진실된 행복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네가 꺼낸 말, 내가 이미 앞에서도 많이 언급한 말. 네가 아닌 우리를 사랑했다는 것.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 나의 너는 이미 예전부터 나에게 찢기고 있었구나.



울면서 그만해 달라고 비는 널 도무지 두 눈으로 볼 수 없어 질끈 감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너무 미안해. 생각해 보면 네가 제일 행복해 보이던 건 열일곱의 첫 만남이었다. 우린 거기서 끝났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말을 꺼냈다. 8년 만이었다.



“그래.”

“······.”

“그만하자.”



죽어버리고 싶었다. 너와 나, 너의 사랑, 나의 사랑, 우리까지 전부 죽여버린 난 죽어야 마땅했다. 고마웠다며 내 손을 잡아오는 네 손길이 이제껏 경험한 적 없는 차가운 온도였다. 손마디가 가늘었다. 그때 네 표정은 어땠지. 울고 있었나, 웃고 있었나. 어쩌면 둘 다였을까. 내 사랑의 궤도에서 벗어나 네 사랑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무한히 생겼으니.



***



그렇게 스물여섯, 난 널 만난 이래로 아주 오래간만에 아침밥을 홀로 먹었다. 습관처럼 챙긴 수저 두 짝이 애처롭게 거실을 뒹굴었다. 언제부터 네 짐이 사라져 있었지. 넌 내가 모르는 사이에 차근차근 조심스레 네 짐들을 치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분명 네가 떠난 게 어제인데 남은 네 흔적이 내 머릿속 기억들 뿐인 걸 보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네 모습은 내 편도체에만 남아있을 생각인 듯하다. 널 떠올리면 괴로워졌다. 어지럽다.



하나, 둘.
하나, 둘.


하나, 넌 날 사랑한다.
둘, 난 널 사랑한다.

하나, 넌 내 사랑을 눈치챘다.
둘, 난 내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나, 넌 울었다.
둘, 난 네가 운 줄 몰랐다.

하나, 넌 나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둘, 난 눈을 감은 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나, 넌 날 사랑했다.
둘, 난 널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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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하나, 하나.



언제까지 모든 일을 네가 먼저 하는 걸까. 사랑을 말하는 것도, '미래'라는 열기구를 띄우는 것도, 우리라는 불로 미래를 잔뜩 올려두는 것도, 그 열기구는 언젠가부터 형태를 알수없이 망가져 버렸다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넌 대체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생각인 건지. 넌 왜 날 사랑했을까. 넌 왜 비극을 자초한 걸까.



자기야, 내 사랑아. 내가 널 울게 했는데 왜 아무 말도 꺼내지 않고, 내가 널 방치했는데도 외롭다는 말 하나 꺼내지 않으며, 널 사랑하는 마음보다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다는 걸 눈치를 챘음에도 어째서 나를, 어째서 우리를 사랑한 거야? 네 사랑은 왜 이렇게 비밀스러운지, 그 사랑이 왜 나를 향했는지 알 턱이 없다. 열일곱의 미소들이 꽤나 예뻤던 듯하다.



두 손에 쥐고 있던 수저 두 짝은 이미 추락해 있었다. 난 너와 나의 열기구가 추락이 아닌 착륙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내 바람들은 전부 이기적이기에, 이뤄질 희망같은 건 저버린지 오래다. 도무지 너없이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네 손처럼 차가운 바닥에 떨어졌다. 나의 지독한 불행아, 한 번만 웃어줘. 내 사랑이 널 아프게 하지 않았다고 말해줘.



만일 어젯밤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네가 다시 웃어 줄 걸 알기에 내 의지와 관련없이 울고 있는 널 떠나 보냈다. 더 이상 네가 내 품에 있어선 안 됐다. 밥솥이 울려대는 경쾌한 음악에도 난 크게 울어댈 수밖에 없었다. 선풍기 하나 없는 이 집에서 넌 창백한 손으로 네 얼굴을 얼마나 감쌌을지. 네가 열어 둔 창의 틈에서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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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더운 팔월의 싸늘한 스물여섯이었다.















함께 해서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젊었고, 지금도 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