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우정

17. 혁명으로 기록되기를

계엄군이 떠나간 광주는 평화로웠다. 시민군을 중심으로 엉망진창이었던 광주는 차츰 원래의 활기를 띠게 되었다. 시민군들은 당장 굶주린 사람들에게 계엄군이 남기고 후퇴한 식량을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고 병원은 그 어느때보다 바쁘게 돌아갔다. 장정들이 죽은 시체를 가져다가 장례를 치러주었다. 수빈은 본래 광주 외곽에 살았던 터라 금세 이 분위기에 뛰어들었지만 연준은 벅차하면서도 어색해 했다.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는 확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얼음판 위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더 큰 불안을 초래하며 불확실한 미래를 철저히 흑빛으로 물들여버린다. 연준은 제법 더운 바람이 목덜미에 스치는 것을 느끼며 초록빛 생각을 하다가 인기척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수빈이 물었다. 연준은 고개를 들어 수빈과 마주보았다. 수빈의 해사한 미소에 모든 잡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연준은 공원 벤치에서 일어나 수빈과 어깨동무를 했다. 집에 가야지. 연준이 말했다. 뭐에요, 그게. 수빈이 웃었다.


“그냥. 이렇게 훤한 대낮에 나올 수 있다는게 신기하네.”
“앞으로도 그럴거에요.”
“닌 진짜 그렇게 믿어?”
“왜 그래요. 다시 계엄군이 올까봐?”


형은 진짜 쓸데없는 생각 좀 줄여야 해요. 수빈이 연준의 머리를 톡톡 쳤다. 그 뒤에 상당히 매운 꿀밤을 먹었다. 수빈이 죽는 소리를 하자 연준이 한 대 더 때렸다. 우와 이 형 의사 맞아? 수빈이 경악했다.


“이참에 장의사로 바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 혀엉…….”


합법적 무장투쟁이란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여지없이 반란이 된다고 했다. 사람들은 광주의 오뉴월은 분명 혁명이라고 기록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느티나무 밑 정자에서는 지긋한 어르신들이 장기를 두며 장군이니 멍군이니 했다. 나도 장기나 배울까. 연준이 손을 머리 뒤로 하며 말했다. 어쩐지 서울보다 광주가 더 편한 것 같았다. 모든것이 끝나고 나면 졸업하고 광주로나 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정확히 수빈의 머리를 조준해 날아오는 최루탄을 보았다. 씨발, 이건 또 뭐야.


“…형.”
“…어.”
“세상이 멸망하려나봐요.”


연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의.”


두 사람은 예고없이 들이닥친 군인들을 피해 골목과 상가 사이를 헤집어가며 집으로 죽을 듯이 달음박질 했다.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소리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쫓길 때 달리는 법을 이토록 빨리 상기시킨 몸뚱아리도 야속했다. 수빈은 턱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넘어진 한 중년의 남자를 일으켜 등에 업었다. 심장이 빨리 뛰었고 여기저기에서 아는 사람을 애타게 찾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다 자신을 꽉 눌러버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뛰기가 힘들었다. 가뿐하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무게도 점점 무거워졌다. 연준은 도망치는 사람들의 뒤꽁무니에서 할머니 한 분을 안아서 죽을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시민군들은 급히 광주시청에 모였다. 배종은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 나이가 든 것 같았다. 수빈은 M1카빈을 들고서 말없이 바닥의 태극기를 집어들었다. 광주시청 안은 시민군과 함께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중에 광주시청을 향해 천천히 죄여오는 계엄군의 발소리에 심장이 빼르게 뛰기 시작했다. 수빈은 심호흡을 했다.


“얌마, 너 같이 어린애는 가서 공부를 해야 하는거야.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셔? 빨리 가.”
“어리다고 못 싸우는거 아니거든요?! 아저씨는 가족이 총맞아 죽어봤어요? 내 눈앞에서 죽는거 봤냐고!”
“그래 봤다, 이 씨발새끼야! 그러니까 가라고 하는거야! 저 인간들한테 너까지 내주지 말라고!”


실랑이하는 소리, 곧 싸우려는 사람들과 돌아가라고 종용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데 엉켜있었다. 배종이 낡은 마이크를 집어들고 입을 열었다.


“20살 미만 학생, 여자, 노약자는 당장 돌아가십시오. 저들은 다 죽일겁니다! 여기 남은 사람 중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일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서! 우리의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목숨이 꺼질 때까지 싸울겁니다. 돌아가서 우리의 마지막을 온 대한민국에 밝혀주십시오!”


자꾸만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을 힘으로 밀어낸 장정들은 광주시청 입구에 자물쇠를 채웠다. 며칠전 계엄군의 퇴각조건으로 무기를 대부분 낸 뒤라 손에 쥔 것은 변변찮았다. 배종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서 죽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휘관들이 대표로 맑은술을 한잔씩 마셨다. 제삿술이었다. 공수부대의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광주시청 내 모든 폭도들은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시민군들은 창문과 문이 모두 잠긴 건물 안에서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폭도가 아니다! 우리도 대한민국 국민이란 말이다!”


그 쩌렁쩌렁한 소리는 시발점.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쉴새 없이 날아오는 총알들에 수빈은 끊임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하나둘씩 쓰러져가는 동료들 사이 나는 왜 홀로 살아 방아쇠를 당기고 있나요. 수빈이 하늘을 향해 물었다. 동료들은 점점 무기를 놓고 쓰러지거나 경련하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창문이 깨지는 소리, 광주시청이라는 건물 하나를 둘러싸고 온갖 무기를 내던지는 계엄군의 그림자, 그리고 숨막힐 듯이 뜨거운 열기가 수빈을 잠식했다. 어느새 그는 남의 피를 뒤집어쓰고 한 손에 총을 다른 손에 화염병을 들고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은 수의 동료들과 서 있었다. 사격이 잠시 멈추었다. 수빈은 고개를 들어 야속하게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 죽음들이, 이 개죽음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가 물었다.


“끝난…건가…?”


한 젊은 동료가 중얼거렸다. 그때에 총성과 허벅지부터 온몸이 금이 가는 것 같은 고통에 수빈은 총을 놓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야 수빈아! 최수빈!”


깨진 창문 사이 달빛 너머에서 수류탄 한 발이 날아왔다. 수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난도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