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와 막무가내는 처음이지

금목서, 재떨이 1





Gravatar

금목서, 재떨이 1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케케묵은 일기장과도 같아 고작 첫 장 넘기기에도 주저하게 되는 그런 글. 그때가 사무치게 그리워 한 번 보려다가도 그만두게 되는 그런 사람. 이미 마음에서 덮었고 지웠고 묻은 그런 인연을, 그런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는가.



















“2개월 됐네요. 축하드려요 산모 분.”

“…”

50대 중년 여성으로 보이는 의사가 거듭 모니터의 특정 부분을 검지로 원을 그리듯 강조하며 말했다. 그게 내 뱃속에 있고, 그게 하나의 생명이라고. 사실 분간이 잘 안 됐다. 무얼 말하는 건지. 회백색으로 가득 찬 그 화면으로 도대체 뭘 축하할 수 있다는 건지. 겉보기엔 소파처럼 생겨 편안할 것 같던 그 의자는 앉아보니 딱딱해서 엉덩이가 아파오던 참이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오기까지 기억이 없다. 무슨 정신으로 거길 나왔나.

가슴 아래 배를 문질렀다. 어떠한 느낌도 오질 않았다. 이 안에 내 피를 먹고 자라는 생명체가 있다고. 정확히는 그 새끼의 피로 자라날 핏덩이가.








.




“이 씨발련아. 알아듣게 처말해.”

“…당신 아이가!”

“…“

”당신 아이가 생겼어요.“


가래 섞인 침을 뱉으며 악에 받쳐 소리치던 그가 드물게 잠잠해졌다. 손에 그러쥔 내 머리칼을 놓으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꼴에 지 자식의 존재가 감격에 겨웠나보다. 어차피 지울 거, 잠깐이라도 그 감동을 누리길 바랐다.


“…나도 애 아빠네?”

“…”

“지하야, 씨발 우리가 부모라니!“

”…“

“이럴 게 아니다, 그래. 혼인신고부터…”



그날 그 새끼는 내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 기뻐 반지하에서는 도무지 있을 수가 없었는지, 해 지기 전 집을 나가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왔다. 늘 그랬듯 술을 진탕 마셨겠지 싶었다. 아침에 눈 뜰 때 그 작은 단칸방이 알코올 냄새에 절여질 수준이었으니.












.




언제부터 내 인생이 그렇게 시궁창이었냐 하면은, 글쎄. 그렇게 유구한 역사가 있던 건 아니다. 남들 하는 평범한 연애가 시작이었다. 상대는 스물 여덟, 본인은 스물 셋에 유기견 봉사를 인연으로 시작된 만남이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일 거라는 그 오만한 착각. 환히 접히는 그 눈웃음 뒤에 가려진 우악함을 모르고서 시작된 어느 20대의 연애였다.

술을 먹으면 손부터 휘두르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잘못됨을 인지했지만, 머지 않아 그 현실에 안주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니까. 번듯한 부모가 있기를 해,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있기를 해. 손을 내밀 사람은 더욱이 없었고.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위해 일찍이 돈을 벌어야 했던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공장에 취직했는데, 그 경제적 결점을 어느 정도 덮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정도 능력이 아니었지만 어린 내 생각에.

그렇게 스물 다섯의 지금까지 이어진 관계다. 원치 않는 관계를 일방적으로 요구해오며 당하던 적은 다분했으며, 술을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뭐 하나는 깨부수어야 끝이 났다. 그렇게 연명해온 거지같은 삶이었다. 그런 인생이었다. 그랬는데…













Gravatar

“죽었습니다. 아가씨 남편”









마른 하늘에 축제였다. 

정확히는 그 새벽에 들어온 그 새끼가 아침에 집을 나간 뒤로 돌아오지 않았다. 언젠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었다. 노름을 위해 사채업에 손을 대다 간혹 문신한 남자들이 집 앞에 찾아올 때를 보면. 그리고 다음날 아침, 웬 처음 보는 수트 차림의 남자가 경첩이 닳아 삐걱거리는 철제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와 부고를 전했다.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뱃속의 핏덩아, 편하게 보내줄게.



“장례는 안 치를게요.”

“…”

“시체가 나왔든, 없든 그것도 안 물을래요.“

”…”

“뭐가 됐든 다 알아서 해주세요.”


그 새끼의 측근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사람 앞에서 환희를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그렇지만 더이상 그를 가까이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는 최소한으로 간결하게 내보여야했다. 난 죽어도 그의 가는 길을 배웅할 생각이 없으니.

그런데 어째서 내 앞의 이 남자는 표정의 동요 하나 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는가. 느리게 깜빡이는 그 눈꺼풀이, 안광 하나 담기지 않은 그 새까만 눈동자가, 바로 그 밑에 눈물 마냥 찍힌 그 점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Gravatar

”아가씨가 머물 곳을 마련해뒀습니다.“

“…네?”





무슨 소리지 싶었다. 그의 부고 소식이 첫만남인 이 남자에게서 들려온 두 번째 말은. 사실 이게 그 새끼의 노름판인가 싶기도 했다. 다 짜여진 판에 놀이말 같은 게 되어 또 수렁에 빠지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우습게도 남자가 입을 열었다.






“김태수. 사고사.”

“…”

“시체는 발견될 일 없습니다.”

“…”

“태웠으니까요.“




그 순간이었다. 온몸을 돌던 피가 차게 식으며 털이 쭈뼛 서던 것이. 온 감각이 내 앞의 남자를 경계하라 말하는 듯 했다. 더이상의 부연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김태수의 죽음에 이 남자가 관여했겠구나. 그렇다면 이 남자는












“소개가 늦었습니다.”

“…”











Gravatar

”김태수 씨 동생, 김태형입니다.“














.





김태수에게서 형제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더군다나 이름만 닮았지 외형적으로 조금이나마 비슷한 곳을 꼽으라 해도 전혀 찾을 수 없는 이 남자와. 형제라고? 

털이 설 정도의 원초적인 공포에 나도 모르게 아직은 평평한 배에 손을 갖다대었다. 다른 의미는 없었다. 뭐 모성애를 같잖게 흉내낸다거나 그런 뜻은 더더욱.





“…원하는 게 뭐예요”




남자는 내 입 부근을 유심히 보다 이내 시선을 들어올려 내 눈을 마주보았다. 웃었다. 입꼬리를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마치 흥미로운 꼴을 보았다는 듯이. 그마저도 머지 않아 사라져 다시금 정색을 하셨지만.




“그런 거 없어요.”

“…”

“마땅히…”

“…”






“가족으로서 책임을 다하려는 겁니다.”




가족으로서의 책임이라. 재밌는 단어 선택이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너무 거슬렸다. 아까 들어올 때 김태수를 내 남편이라 지칭한 것도 그렇고. 둘이 가족이라기엔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았다. 우린 혼인신고를 한 사이도 가족 같은 사이도 그 무엇도 아닌 갑을 관계였음을 모른다고.







“그런 책임이라면 사양할게요.”

“…”

“고인과 가족으로 엮일 사이가 못 돼서.“

“…”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아주 찰나였으나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들었다는 듯 그 진한 눈썹이 잠시나마 동요하는 순간이었다. 그럼 그렇지 당신이 김태수와 사소한 이야길 공유하는 보편적 형제 관계일 리 만무하다. 어디서 대충 뒷조사나 하고 왔겠지. 3년 가까이 교제한 여자가 있고, 그 여자와 동거 중이라고. 그러면 당신은 기꺼이 믿었을 거야. 김태수의 부고를 접하고 슬퍼할 보통의 연인인 안지하라는 여자를.

내 태도를 보고 조금은 알았을까 싶네.











“정 아니다 싶으면”

“…”









Gravatar

“제가 김태수 자리를 대신하는 건요.“









남자가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왔다. 여전히 안광 없는 칙칙한 눈동자가 말해주고 있었다. 무언가 검은 속내를 가지고 내게 접근하려 한다는 것을. 형의 여자를 탐하는 아우라… 도덕성 측면에서는 김태수와 형제라 해도 믿을 만하다. 가만 듣고 보니 기가 찼다. 이미 시궁창인 인생에 처음 보는 사내 새끼까지 거들 필요가 있나.

조금 강하게 나가보기로 했다.









“조카 입장에선 개족보가 따로 없네요.”

“…”

“그쪽 형 자식도 품어줄래요?”

“…”

“그럼 좀 고민해보고요.”












.





다 낡아 부서지기 직전의 철제 문을 닫고 나온 그는 계단을 딛으며 자연스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밖에서 한참을 정자세로 기다리던 부하는 잽싸게 불을 붙이기 바빴다. 담배 끝이 천천히 타오르자 내내 무표정을 유지하던 그가 볼이 패일 정도로 연기를 빨아들였다. 표정에 티 나게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재현아”

“예.”

“김태수.“



낯익은 이름이 들려오자 차 앞에서 기다리던 또 다른 부하도, 불을 붙여주던 남자도 눈에 띠게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 그 다음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며 그들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렸다. 마치 금기의 언어를 입에 올린 것 마냥.





“시체 어디 뒀더라.“

“김 회장님 자택 뒷산에 묻었습니다.”

“다시 꺼내.”

“예?”




입술 사이로 희뿌연 연기를 토해낸 그가 얼마 피우지도 않은 걸 떨궜다. 구둣발로 대충 비비며 불씨를 잠재우더니 이내 준비된 세단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여전히 벙찐 부하는 차창이 내려가기만을 기다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이 미친 놈이 또 무슨 명을 내릴까 하고.

이내 썬팅이 된 차창이 내려가며 드러나는 남자의 옆선. 부하는 상체를 90도 인사하듯 숙여 그의 눈높이보다 낮아지기 위해 애쓰는 모양이었다.










“산산조각내서 바다에 던지고 와.”

“…”








Gravatar

“사람인 걸 못 알아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