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1. 재벌3세가 꽃집에 빠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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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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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동안 나는 한 번도 크게 엇나간 적이 없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엇나갈 기회 자체가 없었다. 부모님이 정해준 일정표 안에서 살았고 정해진 시간, 정해진 기준을 넘기기 위해 버텼다. 집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폭력이나 결핍 같은 건 없었다. 다만 선택권이 없었을 뿐이었다. 부모님은 늘 “너를 위해서”라고 말했고, 나는 그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한국대 의대에 합격했을 때 집안은 원래 그랬어야 했다는 듯 조용히 지나갔다. 친척들은 나를 자랑처럼 꺼내놓았고, 부모님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계속 그 기대에 맞춰 살았다.

 

병원에 들어가서 일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만큼 바빴고, 체력적으로 힘들었지만 “의사는 원래 이런 거야”라는 말에 익숙해졌다.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들을수록, 이상하게도 마음은 더 비어갔다. 남들 눈에는 안정적인 인생의 궤도에 올라선 것처럼 보였겠지만,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직이 끝난 새벽, 병원 근처를 걷다가 우연히 작은 꽃가게 앞에 섰다. 문은 닫혀 있었고, 유리창 너머로 화분 몇 개가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참을 서서 들여다봤다.

 

그날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순간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삶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당연히 반대했다. 잠깐 힘든 시기일 뿐이라고,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했다. 나도 그 말이 틀린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변했다. 집을 나와 혼자 살기 시작했고, 모아둔 돈을 정리했다. 꽃집을 열게 된 건 계획이라기보다는 충동에 가까웠다.

 

큰 가게는 엄두도 나지 않아 작은 원룸 하나를 얻어 앞쪽을 가게처럼 고쳤다. 처음 들여온 꽃은 장미와 국화, 제라늄 정도였다. 꽃을 배운 적은 없었지만, 병원처럼 정해진 매뉴얼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현실은 금방 드러났다. 손님은 많지 않았고, 가게를 열어두기만 해도 돈은 빠져나갔다. 모아둔 돈 덕분에 당장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통장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하루 매출이 ‘0’인 날도 적지 않았다.

 

그래도 꽃을 만질 때만큼은 달랐다. 줄기를 자르고 잎을 다듬는 동안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잘해야 할 기준도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게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은, 남이 정해준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종소리가 울렸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낯선 남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잠깐 주변을 둘러보는 눈치가, 들어와야 할 곳이 맞는지 확인하는 사람 같았다. 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길을 잘못 들었구나. 이 동네는 원래 그렇다. 괜찮은 수도권 동네지만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이 길을 잘 잃는다.

 

낮에는 그럭저럭 익숙해 보여도 해가 조금만 기울면 풍경이 금방 바뀐다. 골목은 많고 표지판은 적어서 한 번 방향을 헷갈리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 비슷한 간판들이 줄지어 있고 불이 꺼진 가게들 사이로 불쑥 켜진 창 하나가 눈에 띄면, 생각 없이 문을 열게 되기도 한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여기 꽃집 맞죠?”

“네.”

 

 

짧게 대답하자,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문 손잡이에 올려두었던 손을 잠깐 내려다보다가, 다시 안쪽을 힐끗 봤다.

 

 

“길을 좀 헷갈려서요.”

“이 근처가 그래요.”

“그렇죠? 분명 지도 보고 왔는데, 갑자기 전혀 다른 데 서 있는 느낌이더라고요.”

“처음 오신 분들은 거의 다 그래요.”

 

 

그는 그제야 완전히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고 종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잠깐 봐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진열대를 천천히 둘러보던 그는, 꽃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급하게 살펴보는 느낌은 아니었다. 시간을 때우듯, 혹은 생각을 정리하듯.

 

 

“꽃을 잘 모르는데요. 괜히 들어왔나 싶어서.”

“괜찮아요. 보는 건 공짜니까요.”

“그럼 다행이네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는 꽃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를 보고 있었다.

 

 

“혹시, 추천도 해주시나요?”

“음...용도에 따라요?”

“특별한 용도는 없어요.”

“선물도 아니고요?”

“네. 그냥 집에 둘 생각이라서요.”

 

 

그의 대답에 나는 잠깐 말을 멈췄다. 선물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도 없다는 말이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이 가게에 들어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기념일이거나, 사과이거나, 의무처럼 챙겨야 할 무언가. “그냥 집에 둘 생각”이라는 말은 드물었다. 아니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꽃을 보고 있었다.

 

 

“집에 두실 거면, 오래 가는 게 좋아요.”

“음... 솔직히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거나 두셔도 되긴 해요.”

“그래요?”

“대신 금방 후회할 수도 있고요.”

 

 

그는 그제야 나를 봤다. 아까까지는 줄곧 꽃만 바라보고 있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갑작스럽게 마주친 눈빛에 잠깐 멈춘 듯하더니, 곧 어색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마디 없이도, 방금 한 말이 예상 밖이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건 좀 곤란하네요.”

“집에 둘 거면, 버티는 애들이 좋아요.”

“버티는 애들.”

“네. 손 많이 안 가고 조용한 것들.”

 

 

나는 진열대 한쪽에 놓인 화분을 가리켰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초록 식물이었다.

 

 

“이런 건 어때요?”

“식물이 생각보다 작네요.”

“대신 오래 가요.”

“얼마나요?”

“사람이 하는 만큼요.”

 

 

그 말에 그가 작게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분명했다.

 

 

“그럼 제가 못하면 금방 죽겠네요.”

“완전히는 아니에요. 좀 시들 뿐이지.”

“그게 더 미안한데요.”

“그래서 추천해요. 다시 살아나거든요.”

 

 

그는 잠시 화분을 내려다봤다. 손을 뻗을까 하다가 멈추고, 그는 그 말이 마음에 걸린 듯,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잎을 한 번 더 훑어보고, 흙 표면을 내려다봤다. 아주 신중하다기보다는, 괜히 한 번 더 확인하는 사람처럼.

 

 

“이걸로 할게요.”

“바로요?”

“네. 더 고민하면 못 고를 것 같아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화분을 들었다. 계산대로 옮기며 포장지를 꺼냈다. 투명한 걸로 할지, 연한 색으로 할지 잠깐 고민했다.

 

 

“포장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너무 티 나지 않게요.”

“집에 두실 거니까요?”

“네. 그냥… 거기 있었으면 해서요.”

 

 

포장지를 접으며 잠깐 그를 봤다. 그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어색해 보이지는 않았다.

 

 

“물은 얼마나 줘야 해요?”

“흙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요. 생각날 때 한 번씩 확인해주면 돼요.”

“생각나야겠네요.”

“대부분은 그게 제일 어려워요.”

“그래도 한 번 해보죠.”

 

 

나는 포장을 마치고 화분을 내밀었다. 그는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잘 키워볼게요.”

“너무 잘 키우려고 하진 마세요.”

“왜요?”

“그럼 서로 부담돼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