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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퀴엠

피아노의 선율이 바람처럼 퍼져나갔다. 은태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되어 퍼져나간 선율은 은태의 손가락 끝에서 실현되어 모든 것을 잠재웠다. 은태는 고개를 들었다. 또 다른 자신이 은태의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실에 손가락 마디가 묶여 또 다른 자신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대로 은태 또한 그렇게 움직였다. 기괴한 광경이었으나 아름다웠다. 벅차오르는 기쁨이 은태를 감쌌다. 그리고 나서 은태는 눈을 떴다. 선박에는 새벽공기와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그 자신 밖에 없었다. 은태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확실하게 꿈속을 더듬어가며 그는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을 재현해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은태는 문득 자신이 지쳤다는 것을 알았다. 유달리 피곤했다. 짧은 시간동안 그는 두통을 느꼈다. 숨이 턱 막힐 듯한 그 두통은 뒤에서 들려오는 박수소리에 갑작스레 잠잠해졌다.

“브라보.”

뒤를 돌아보자 우혁이 빙긋이 웃었다. 은태도 웃었다. 그건 못 들어본 곡 같은데. 우혁이 물었다. 꿈을 꿨거든. 그가 대답했다. 우혁이 은태의 옆에 섰다. 낮고 풍부한 목소리와 닮은 친구의 체온에 은태는 안정감을 느꼈다. 우혁이 갑판 너머 막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다.

“넌 분명 조선에서는 성공할거야. 생각해봐. 고향에서의 기립박수. 내 말 믿어, 친구. 넌 모차르트의 현신이라니까. 단지 동경에서 인정받지 못한 것 뿐이야. 그리고 가만 생각해보면 인정받지 못한 것도 아니지. 한 성당에서 자네의 곡을 사갔지 않아.”

은태는 씁쓸하게 웃었다. 태양이 떠올라 두 사내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두 사람 앞에 놓일 날들을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동경에 가느라 모든 돈을 쓴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값싼 여관에 머무는 수 밖에 없었다. 우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은태는 개의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트렁크를 열었다. 성큼 다가온 가을의 날씨가 제법 서늘했다. 우혁이 튼 축음기에서는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요즈음 미국에서는 재즈가 유행한다고 했다. 정통파 음악가들이 설 세상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다. 은태는 여관의 낡은 침대에 몸을 던졌다. 피부가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배에서 계속된 피로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재즈의 선율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까슬까슬한 시트에 돌아누우니 셔츠 단추가 반쯤 풀린 우혁이 다가왔다. 자자, 그렇게 누워만 있을 순 없지. 그가 은태를 일으켰다. 그리고 두 사람은 축음기가 멈출때까지 춤을 추었다.

“이봐, 은태.”

신께선 네게 그렇게 고결한 음악적 재능을 주었지만 춤은 아닌듯 해. 말을 마친 우혁이 소리내어 웃었다. 무일푼의 청춘에게 남은 것은 악상과 악보와 서로 뿐이었다. 은태는 서랍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침대에 누운 우혁을 바라보았다. 우혁이 웃어주었다. 그날 경성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은태의 악보 몇 장을 판 돈과 우혁의 길거리 연주로 일주일간 생활한 결과 두 사람은 모두 이렇게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관에서 묵는 것조차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은태에게는 이제 남은 악보가 열 곡이었고 우혁의 바이올린은 송진을 바를 돈이 없어 불쾌하게 끽끽거렸다. 은태는 일어섰다. 방세라도 내려면 악보를 팔아야 했다. 날씨조차 모르고 나간 길거리는 살을 에일 듯이 추웠다. 덜덜 떨리는 몸을 끌어안고 은태는 한 악보상으로 갔다. 악보를 파는 곳이 있기에 망정이지 안그랬다면 새로운 악보를 원하는 연주자를 찾아 경성을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깔끔한 가게에 들어서자 퍼지는 따스함이 너무 반가워져 은태는 눈물을 훔칠 뻔 했다. 깨깨마른 일본인 주인장이 그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았다. 노골적인 시선에 귀가 붉어졌다. 주인장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어 용건을 물었다. 은태는 모직 코트에 품어 가져온 악보를 내밀었다. 저 앞에 놓인 종이 스무 장에 일본인이 눈썹을 치뜨며 피아노 앞으로 가라고 했다. 그리고는 거만한 태도로 연주해보라는 듯이 고개를 쳐들었다. 은태는 조심스럽게 건반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선율을 연주해가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되었소.”

주인장이 말했다. 그의 눈에 얼핏 맺힌 눈물을 은태는 기이하게 여겼다. 정말이지……조센징 다운 음악이로군. 일어날 힘이 쭉 빠졌다. 손이 경련을 일으키듯이 떨렸다. 머리가 아팠다. 마치 이 곡을 처음 연주했던 그 선박 위에서처럼.

“내 말을 모욕으로 듣지 마.”
“…?”
“자네같은 조센징들의 비극적인 삶을 들려준다는거니까.”

정말이지……가슴을 저미는 것만 같군. 그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내가 만약 지금의 권력자라면 자네를 고용해서 선전음악을 하게 할거야. 섣부른 판단일지도 모르지만 자네의 음악에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 주인장은 그 악보에 구십 전을 주었다. 거의 1원이나 다름없는 금액이었다. 백동화 구 푼이 손에 떨어질 적에 은태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다. 돈을 벌었다는 기쁨과 자식을 구십 전에 팔아넘기는 슬픔이 교차했다. 누군가의 꿈이 구십 전에 팔릴 수 있구나. 당장 인력거꾼이 남대문까지 갔을 때 벌 수 있는 돈보다도 적었다. 점점 더 낙하하는 기분에 은태는 서둘러 뒤돌아 걸었다. 추위에 빨갛게 된 손을 잠시 응시하던 주인장은 은태의 뒷모습에 대고 물었다.

“내일 실력있는 연주자가 필요한데.”
“……”
“여섯 곡 정도를 연주하게 될 것이네.”
“……”
“한 곡을 연주할 때마다 지금만큼 주겠네.”

은태는 어쩔 수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거의 울 듯한 눈으로 물었다. 한 곡당…1원은 안 됩니까……? 주인장은 잠시 은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오후 5시 정각에 여기로 오게. 은태는 재차 1원을 약속 받은 뒤에 악보상을 나섰다. 목구멍에 응어리가 졌다. 추운 날씨가 유난히 따스하게 느껴졌다. 다시 도착한 여관에서는 우혁이 팔을 괴고 잠을 자고 있었다. 서늘한 옷자락이 우혁이 길거리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했다. 은태는 우혁의 곁에 걸터앉아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한동안은 나가지 않아도 돼.”

우혁의 기침소리가 대답했다.




주인장은 거대한 일본식 저택으로 은태를 이끌었다. 벌써 파티로 떠들썩 한 것 같았다. 은태는 일본인의 걸음걸이에 맞추려고 노력하면서 저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온갖 진귀한 도자기며 물건들로 장식한 안은 화려함의 극치였다.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번잡한 저택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광이 나도록 깨끗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은 발을 딛는 것조차도 망설이게 만들었다. 주인장은 은태의 손목을 쥐고 3층으로 올라갔다. 이토 대위님, 말씀드렸던 연주자입니다. 주인장이 말했다. 들어오시게.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은태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불빛을 등지고 선 대위의 실루엣은 무척이나 건장했다.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이토 대위는 돌아섰다. 그는 꽤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멋들어진 콧수염 때문에 본래 나이보다 많아보이긴 했지만 그마저도 귀족의 품격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다만 그는 귀족이 아니라 떼돈을 번 졸부의 아들이었다. 전쟁터에 나가 대위가 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에게서 왜곡된 소문을 듣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이야기해주겠네. 이토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면서 말했다. 그의 관심사는 은태의 연주가 얼마나 자신의 집안의 배경을 감추어줄 수 있느냐였다.

“난 이미 저들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말을 해버렸네. 오만한 영혼의 저들이 절대 찾지못할, 그야말로 신이 내린 음악가를 찾아서 데려오겠다 했지. 온몸을 전율케하고 가장 척박한 가슴에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는 사람. 나같은 군인의 심장마저 후벼파는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 류이치가 데려온 자니 어느정도 신뢰는 가지만 명심하게. 내가 기대하는 것, 그 이상이어야 할 것이네. 할 수 있겠는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토는 얼른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가서 샴페인이나 들이키고 있게. 오늘밤 마시는 것이 마지막일테니 말이야. 은태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여덟시를 알리는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울리자 류이치가 은태를 피아노로 인도했다. 자신을 소개하는 이토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손끝에 닿는 차가운 건반 외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은태는 꿈속의 황홀함을 더듬어 자신의 악보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번째 연주가 끝났을 때에 은태를 맞이한 것은 눈물을 글썽이는 일본 귀족들의 얼굴과 귀가 멀 것만 같은 박수소리였다. 그들은 은태에게 열광했다. 그들의 체면 따위는 이미 버린지 오래였다. 서툰 -그러나 그것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억양으로 미친듯이 앙코르를 외치면서 그들은 은태의 손가락이 닿은 건반이라도 숭배할 기색이었다. 손끝에서 짜릿한 느낌이 드는 동시에 숨이 막힐 정도의 고통이 찾아왔다. 어디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슴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함성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우상이 새하얗게 질려가는 중에도 사람들은 외치기만 했다. 앙코르! 앙코르! 모든 것이 두려워졌다. 앙코르! 앙코르! 동공이 커지고 숨을 간신히 잡으려는 절박한 움직임이 확연히 보이는데도 귀가 깨질 것만 같은 앙코르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앙코르! 앙코르! 먼발치에서 류이치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서 은태에게 걸어왔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곧 사라졌다.

“자네 괜찮나?”

입을 떼는 것조차 아팠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병자처럼 온몸을 떠는 은태를 보자 류이치는 그를 소리지르고 박수를 치는 관객들에게서 감쌌다. 멀찌감치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이토 또한 무언가 눈치챈 것 같았다. 류이치가 은태를 부축했다. 이토가 다가왔다.

“그만하면 되었네. 가서 몸을 추스르게.”

이토가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 무리한 모양이야. 이만하고 쉬게.”
“돈…돈은…….”
“지금 그것이 문젠가? 가세. 바래다주겠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류이치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리고 은태의 손에는 일원짜리 열 개가 떨어졌다. 여관의 문턱에 다다르자 생경한 고통도 사라졌다.

“맙소사, 도대체 어디 가있었던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우혁이 물었다. 은태는 받은 돈을 내밀었다. 우혁이 돈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이건 어디서 마련한거야?

“연주를 하러 갔었어. 이토 대위의 집에.”

평소에 나긋했던 목소리가 이제는 힘없이 들렸다. 어쩐지 안색도 더 창백해진 것 같았다. 우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은 은태의 옆 의자에 앉았다. 어젯밤에 악보를 팔러 갔었는데 연주자가 필요하다고 했어. 그것뿐이야. 정말이야. 우혁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렇다기엔 너무 지쳐보이는걸.”
“하룻밤 사이에 십원이나 벌었으니 피곤할만 하지.”

변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한 은태는 쓰러지듯이 누웠다. 어느새부턴가 피아노를 연주하면 고통에 시달려야 했었다. 죽을병에라도 걸린 것인가. 하지만 왜, 어째서 피아노를 칠 때만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지쳐버린 그는 생각의 그물을 넓히기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었다.

“죄송하지만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우혁의 목소리에 은태는 깼다. 우혁이 한 건장한 군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서니 이토가 손짓했다. 동시에 우혁도 말했다. 이리 와봐. 저 거만하신 군인나리께서 아침 7시부터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던데. 우혁이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개인적으로 총독 각하를 볼 일이 생겼네. 어젯밤 자네의 연주회에 각하도 계셨거든.”
“그 말씀은…….”
“오늘 각하께서 자네를 총독부로 초대한다고 하셨어.”

자네를 굉장히 인상깊게 보신 모양이야. 우혁이 은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은태와 우혁의 눈이 마주쳤다. 우혁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은태가 말했다. 가겠습니다. 몇시에 가면 되죠? 이토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은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 생각했네. 세시에 보도록 하지. 그때까지 준비해두게나. 말을 마친 이토가 여관을 한번 둘러보더니 나갔다. 우혁이 은태의 어깨를 잡았다.

“굳이 갈 필요는 없어.”
“알아.”
“그럼 도대체 왜…….”
“그냥……이제 여기서 벗어나야지.”

우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은태는 그의 자존심이 조금 상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평소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우혁을 달랬다.

“또 네 새 축음기도 사야하잖아.”

그제서야 우혁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로 총독이 은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토가 흔쾌히 양장을 빌려주었기 때문에 평소의 초라한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지로 총독이 그를 꽤 오랫동안 쳐다보았기 때문에 은태 또한 총독을 마주보았다. 지로 총독은 눈이 작고 수염이 있으며 대머리를 모자로 감춘 다부진 체격의 남자였다. 지로 총독은 입을 열었다.

“지난 밤 자네의 연주를 매우 인상깊게 들었네.”
“……”

대답을 하지 않자 이토가 옆에서 옆구리를 찔렀다. 영광입니다. 은태가 황급히 말했다.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지?”
“…네.”
“연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곡도 할 줄 안다고?”
“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 각하. 그날 연주한 곡도 이 자가 작곡한 곡입니다.”

이토가 끼어들었다. 총독은 가죽 의자에 앉아 손깍지를 꼈다. 지난 밤 자네 연주는 꽤나 인상적이었지.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검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어 은태는 속으로 성호를 그었다. 마침내 총독이 말했다.

“난 자네와 계약을 하고 싶네.”

안정된 직장을 주겠다는 말이야. 총독이 말했다. 은태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들은 말이 믿기질 않았다. 직장? 그것도 총독부에? 그러나 한낱 음악가가 도대체 어떻게 총독부 일을 할 수 있다는걸까? 마른 등을 타고 식은땀이 미끄러졌다. 이토를 곁눈질했지만 그조차도 이것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계약의 내용은 간단하네. 자넨 그때처럼 마음껏 연주를 하고 작곡을 하면 돼. 자네가 작곡하는 곡의 수만큼 추가로 돈을 지불할걸세. 또 가끔씩 내킬 때 이 건물에 들러 연주를 하고 가게나. 한달에 오십 원씩 주겠네.”
“전…저는…….”
“도대체 왜 망설이는겐가? 자네가 평생 쥐어보지도 못할 돈을 달마다 주겠다는건데.”

총독이 불쾌하다는 듯이 약간 크게 말했다. 은태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총독이 종이와 만년필을 내던지듯이 은태 앞에 내려놓았다. 계약서였다. 은태는 조심스럽게 서명했다. 지로 총독은 그제서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오랫동안 염원하던 것을 손에 얻은 사람의 표정 같았다. 총독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은태의 재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고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발휘시켜줄 수 있는지에 대해 장황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모차르트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자네의 재능은 모차르트의 것보다도 찬란하네. 그건 말이야 마치 아마데우스 같아. 이런,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이군. 잘 듣게. 내 말만 들으면 베토벤보다도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단 말일세. 총독이 거드름을 피우면서 말했다. 그러나 서명을 하고서도 은태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운에 겁이 났음과 동시에 총독의 의도는 따로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총독은 계약에 명시된 오십 원을 먼저 주었다. 그리고서는 매우 거만한 태도로 손을 내저었다. 비틀거리며 총독부를 나오자 이토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자네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대위님.”
“이제 더이상 사사롭게 자네를 볼 수 없으니 아쉽게 되었군. 하지만 대일본제국의 황국신민으로서 나라를 위해 봉사한다는 것은 분명 좋은거야.”
“봉사…라니요……?”
“아.”

내가 너무 말을 많이 한 모양이야. 이토가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서는 자신의 저택을 향해 걸어갔다. 은태는 가을의 거리에 홀로 남겨졌다. 그는 느릿느릿 걸어 여관에 도착했다. 우혁이 낡은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우혁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매우 소상히 듣고 싶다는 것이 눈에서 보였다.

“…일이 생겼어.”

우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그 일본인들에게 굽신거리면서 돈을 받았다는 건 아니겠지?”
“굽신거리지 않았어.”
“잘됐네.”

여관 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미안하다. 우혁이 조용히 말했다. 은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우혁이 돌아누웠다. 그렇게 누워있을 순 없지. 은태가 일부러 축음기를 틀었다. 재즈라고는 끔찍하게 듣기 싫었는데도. 그러나 첫소절이 나오기도 전에 우혁이 축음기를 껐다. 방에 하나뿐인 램프도 꺼버렸다. 신경질적인 몸짓이었다. 은태는 다시 램프를 켰다. 우혁이 이불을 걷고 은태를 노려보았다. 뭐해? 우혁이 물었다. 너야말로. 은태가 말했다. 우혁이 다시 램프를 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램프는 또 켜졌다.

“아냐. 얘기 좀 해.”

우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그래? 그가 따져묻듯이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은태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계속 신경질적이잖아. 내가 일을 구했다는 말을 했을 때부터.”
“글쎄. 아니라니까.”
“그러지 말고 말해봐.”
“아냐 됐어. 말하고 싶지 않아.”

그냥 난 네가 나랑 같은 꿈을 꾸는 거라고 착각했을 뿐이야. 우혁이 말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마구 따지고 싶었다. 그는 우혁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고작 그거 때문이야? 내가 총독의 일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행실을 잘 알텐데? 그는 예술을 경멸하는 작자야. 예술가들을 탄압하고 버러지만도 못한 존재로 여기지. 그런 자에게 넌 놀아나는거야.”

우혁이 은태의 미간을 향해 손가락을 겨누었다. 그의 두 눈에는 실망감, 분노가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은태는 우혁의 눈이 왜 그런 감정을 담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놀아나지 않아.”
“그건 네 생각이지. 내가 그걸 다 몰랐을 것 같아? 굽신거리면서 몸 하나 건사하자고 모든 것을 다 내다파는 네 모습을? 이봐, 우린 예술가야. 공장처럼 음악을 찍어내는 저딴 작자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어째서 스스로 가장 밑바닥을 기려고 해!”

우혁이 말을 마친 뒤 소스라치게 놀라며 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심장부근이 무언가에 그인 듯이 아팠다. 이상하다. 은태는 자신의 얼굴이 멍해졌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무것에도 베이지 않았는데. 칼도 없고 총도 없고 하물며 종이도 없는데.

“…예술? 그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지?”
“이봐 은태…”
“넌 그렇게 고귀하게 살아. 난 밑바닥이나 길테니까. 그게 내 원래 자리야.”
“……”
“넌……. 넌 그렇게 말하면 안되는거잖아.”

우혁은 입을 다물었다. 잘자. 그리고 침대에 누워 램프를 껐다. 더이상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음을 알았다.




정말 멍청하구나, 네 친구. 은태는 그것이 자신의 ‘아마데우스’ 임을 알았다. ‘아마데우스’는 은태의 모습과 매우 흡사해 보였다. 그러나 아마데우스는 은태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토록 빛나는 천재성에게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었다. 은태가 먼저 입을 떼려고 했다. 그러나 아마데우스가 입을 막았다. 어째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리려는거지? 이해할 수 없어.

“그렇게 말하지 마.”
“그럼 넌 평생 이런 여인숙이나 떠돌다가 죽지 그래. 하지만 그렇겐 안돼. 내가 막을 거니까.”

넌 내게 이래라 저래라할 형편이 못돼. 네가 지금 이런 제안을 받은게 누구 덕분인것 같아? 네가 받았던 그 박수갈채가 누구 덕분이냔 말이야. 넌 내 연주에 그저 손가락만 올리고 있을 뿐이야. 내가 사라지면 가장 아쉬울 사람이 누군줄 알아? 바로 너야. 아마데우스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간절하게 반박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천재성을 뺀 저 자신은 아무런 것도 할 수 없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작은 몸으로 답지않게 성질을 낸 모양인지 아마데우스는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지로는 광을 낸 구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은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볼일 없는, 그러나 그 재능만은 인류의 역사를 찾아봐도 전례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것이 꼭 필요했다. 그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신이나 다름없었으니. 지로는 모든 권력은 총독부로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은태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했다. 이번에 손수 총독부 직원들을 닦달해가며 연주회를 준비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아무리 식민지에서 혹은 본토에서 날뛴다 한들 그들은 결국 이 위대한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라고. 그들이 은태의 천재성에게 바치는 칭송과 찬사는 곧 지로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로 모든 분야의 권력이었던 것이다.

“연주자는 아직 오지 않았나?”
“지금 막 당도했습니다, 각하.”

지로는 연주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역시 그날의 양장은 빌려입은 것이 분명했다. 하기야 저런 천한 출신이 그정도의 고급 양장을 가졌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이긴 한가. 그는 대놓고 거만한 눈빛을 보내면서 연주자의 어깨를 꽉 쥐었다. 연륜있는 군인의 악력은 사내라도 견디기 어려웠다. 특히 며칠씩 굶은 사내라면 더더욱. 지로는 한참을 그렇게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로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새로 정장을 맞춰 줄테니 그 옷은 버리게. 그런 옷을 입는 것은 자넬 고용한 내 이름까지 모욕하는 짓이야.”

은태는 지로를 따라 고급스러워보이는 양복점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그가 첫 정장을 맞춘 곳도 여기였으니 말이다. 다만 이미 그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다르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었다. 지로는 딱 한마디만 했다. 이 젊은이에게 어울릴만한 정장을 하나 만들라고. 너무 화려하지 않고 너무 수수해보이지 않을 정도의 정장. 직원들은 자를 대고 여기저기 -팔의 길이나 허리 치수 같은 것들- 재보더니 두주 후에 찾아오라는 말을 했다. 지로는 자신 옆의 탁자를 내리쳤다. 그것으로 두주라는 시간은 이틀로 줄어들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대로 식사를 할 틈도 없이 바느질만 해야 완성할 수 있을테지만 그것이 총독에게 어떤 동정심 따위를 유발하지는 못했다. 은태는 이 상황이 두렵기만 했다. 10년 전 저를 마음껏 무시하던 저들도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졌다. 그는 양복점을 나서서 지로에게 물었다.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자네 연주회가 고작 사흘 남았네.”

지로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먼저 걸어갔다. 은태는 그 뒤를 따랐다. 세상의 어떤 고용주가 연주회 사흘 전에 그 사실을 알려준단 말인가. 그것도 이런 방식으로. 지로의 억센 손이 어깨를 움켜잡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연주를 선보여야 할 거야.”

허리춤에 찬 총이 시선에 닿았다. 은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곧 순종을 의미했고 지로는 세상의 단 하나뿐인 연주자의 복종을 즐겼다.




위스키를 건네받았다. 마시지도 않을텐데 굳이 필요할까 싶어 찬장에 넣어둔 후 은태는 길을 나섰다. 눈이 올 것처럼 새침하게 흐린 듯한 하늘이 보였다. 제법 번듯한 모습으로 거리를 거닐다가 은태는 익숙한 바이올린 선율을 듣고 자리에 멈춰섰다. 후줄근한 차림의 길거리 악사가 심취한듯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왠지 우혁이 생각나 은태는 동전을 몇 푼 넣었다. 악사가 연주를 멈췄다. 은태는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우혁을 거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그의 오랜 친구는 추위에 빨개진 손으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은태를 마주친 것이 거북해보였다. 가슴이 찌르는 듯이 아팠다. 연주회는 저녁 8시. 그때까지 두 시간 남짓의 잉여시간이 있었다. 아마데우스를 만나고 싶어졌다. 그의 괴팍한 성미는 자신조차 종잡을 수 없었으니까. 아마데우스도 이번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야 했다. 은태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마데우스는 순한 짐승처럼 서 있었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입을 앙다물었는데 그것은 오늘 연주가 온전할 것이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은태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이 걸어가야할 긴 카펫이 깔린 복도를 걸어갔다. 피아노가 조명에 싸여 있다. 은태는 심호흡을 한 뒤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렸다. 오늘은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1번이 포문을 열었다. 무대에 올라가면 긴장 따윈 하지 않는다는 음악가들도 있던데 평소 숫기 없는 성격 때문인지 무대 위에서조차 그는 전율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을 평가하듯이, ‘어디 그 천한 출신이 할 수 있으면 해봐라.’ 하듯이 보는 눈빛. 무서웠다. 그래서 더욱 진심을 담아 쳤다. 격정의 천재의 곡은 오로지 또다른 격정의 천재만이 연주할 수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숨을 골랐을 때 은태는 일제히 떨어지는 박수갈채에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곡을 연주했다. 어느새 미소가 지어졌다. 사람들의 눈빛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연주가 마침내 끝났을 때의 환호는 아마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돌아온대도 듣지 못할 소리일 것이다. 은태는 환하게 쏟아지는 조명을 느끼다가 문득 박스석을 올려다보았다. 지로는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제서야 은태 또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술을 권하는 이토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목도리를 두르고 눈이 드문드문 쌓인 거리를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은태는 벌써 집에 와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대문에는 익숙한, 그러나 거기 있어선 안될 얼굴이 보였다. 우혁이 은태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핏발 선 눈과 야윈 얼굴로 그간 우혁이 어떻게 지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우혁은 마치 성난 황소처럼 다가왔다가 곧 눈에 눈물을 머금었다. 은태는 모든 것이 당황스러웠다. 왜 우혁이 제 앞에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미안하다고? 그날 그 말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고?

“…어째서 그딴 짓을 한거야.”
“뭐?”
“어째서 네 연주를 고작 그따위 사람들에게 판 거냐고!”

우혁이 은태의 멱살을 잡았다. 가슴이 수천갈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은태는 우혁의 손에서 벗어나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이 밤이 둘 사이의 어떤 분기점임을 두 사람 모두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정신이야? 왜 네가…!”
“…왜 온거야.”
“……”
“내게 더 할 말이 있었어?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온 거야, ‘나랑 같이 예술이나 하다가 굶어 죽자’ 뭐 그런거?”
“말 조심해.”

은태가 신랄하게 쏘아붙이자 우혁이 낮게 말했다.

“…있지, 우혁.”

은태는 두 팔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난 지금 너무 지쳐버렸어.”

이젠 나, 도저히 이상만을 쫓으며 살 수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은태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우혁은 대답 대신 총을 꺼내들었다. 당황하는 것도 잠시 그것은 은태의 손에 건네어졌다. 너무 낡았지. 그의 씁쓸한 목소리가 말했다. 그것으론 아무것도 죽이지 못해. 장식용에 가깝거든. 고귀하신 분들이 그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사는 것 말이야.

“그걸 자네가 쓰는 일이 없길 바라.”
“뭘 말하고 싶은거야?”
“이제 우리가 따로 걸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잘 있게. 우혁이 말했다. 은태는 잡고 싶었다. 그를 움켜잡고 지금껏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모두 거짓이었냐고 울부짖으며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 평온한 그의 천성에 맞지 않았다. 그에겐 모든 것을 삼키고 홀로 가라앉는 것이 어울렸다. 우혁이 잠시 멈칫했다. 은태는 그것이 우혁을 붙잡을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

우혁의 뒷모습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 연주, 오늘도 좋았어.”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돼.”
“이해하라고 했나? 제발 날 두고 꺼져.”

은태는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 아마데우스는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자신이 은태 속에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금 우물쭈물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널 완전히 통제하겠단 소린 아니야.”

아마데우스는 또다른 악보를 건넸다. 악보 위 음표는 어딘가 불쾌한 붉은색을 가지고 있었다. 비릿한 냄새도 나는 듯 싶었다.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그가 말했다. 다행히도 천재들은 모두 생명을 걸고 천재성을 발휘하거든. 제정신이야? 은태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아마데우스는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게 완전히 빚지고 있는게 아니란 것에 감사해야 할거야.”

은태는 헛구역질을 했다. 아마데우스는 은태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은태가 가난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를 온전히, 느릴지언정 확실하게 파멸시킬 것이다. 은태는 아마데우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마데우스는 기꺼이 그의 목을 내주었다. 목을 조르는 손길이 느껴짐에도 아마데우스는 킬킬거리며 웃었다. 내가 지금 사라지면 넌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조센징 주제에 그나마 할 줄 아는 것은 피아노를 치는 것 뿐이고……. 이제 그마저도 사라지면 네 꼴이 어떨지 볼만 하네. 은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뗐다. 그와 동시에 눈이 떠졌다. 시계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부자리는 식은땀에 젖어 축축했다.




피아노 뚜껑이 열렸다. 사람들은 연주자를 경탄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언가 대단한 것을 연주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바흐의 곡이 흘러나왔을 때 사람들의 눈빛은 조금, 그러나 그 대상자가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식어버렸다. 바흐의 곡은 곧 끝났다. 은태는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귀족들이 예의상 보내는 박수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성가시게 느껴졌다. 어서 끝내고 쉬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은태의 연주 자체에는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은태의 놀라운 재능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었다. 그들은 은태가 무엇을 연주하는지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오직 원하는 것은 집에 돌아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자랑할 만한 연주회였다. 연주가 끝나고 형식적인 환호가 끝나면 그때부터 가장 두려운 것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은태를 홀로 두는 법이 없었다. 서로를 밀치고 당기며, 은태를 이리저리 당기면서 마치 철없는 어린애들처럼 그를 갈구했다. 정확히는 그의 천재성에, 현재 조선의 예술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의 재능에 열광하는 것이었지만. 아마데우스는 잠잠했는데도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은태는 샴페인 잔을 들고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포스러워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수많은 손들이 그를 갈망했다. 은태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며 인파를 헤집고 출입문을 찾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밀쳐지는 통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휘청거리며 문을 따라 나오는 순간 누군가의 발이 걸려 넘어졌다. 더러운 눈이 쌓인 거리에 널브러진 그를 본 것은 저 건물 속 상류층들이 아니라 가난에 찌든 사람들이었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니까 저런 취급 받는거야. 누군가가 말했다. 은태는 천천히 일어섰다. 다음날에 그의 연주를 녹음하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레코딩사에 찾아간 것은 이토의 입김이 컸다. 미나미 총독을 알아보자 모두들 황송해하며 어쩔 줄을 몰랐다. 총독은 뒤따라 들어온 은태에게 아무것이나 하나 연주해보라 지시했다. 총독의 옆에 선 이토 또한 직접 피아노 뚜껑을 열어주는 등 평소보다 호들갑을 떨었다. 그날 녹음한 음악은 은태가 제목을 붙이지 못한 자작곡이었다. 이토가 그 곡의 이름을 짓고 레코드로 만들었다. ‘내선일체’ 라는 생경한 제목을 단 피아노 연주곡은 삽시간에 경성 바닥에 퍼졌고 그 놀라운 연주는 멋모르는 어리석은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제 발로 걸어가게끔 떠밀었다. 조선인 병사들을 전쟁터로 보내는 그 무섭고 또 무서운 열병식에서 호명받은 군사가 일본행 배에 올라탈 때 은태는 그 곡을 계속해서 반복하여 연주해야만 했다. 총알받이가 될 것이 분명함에도 조선 청년들은 눈 깜짝 하지 않고 배에 탔다. 목 언저리까지 쓴물이 올라왔다. 저멀리 행사장 밖에서는 자식을 잃게 된 어버이가 울부짖고 있겠지. 은태는 자신의 두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아무래도 내일은 상담사를 찾아가봐야겠다.




그 일은 족히 삼 년 동안 반복되었다. 괴로워하고 그를 탐닉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는 일이. 사람들은 은태의 모든 것을 알기 원했고 그의 천재성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리고 지로의 유리서랍장 안에 놓인 장식품과 같은 그를 언젠가는 제가 갖고 말리라 호시탐탐 그를 욕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저택 속의, 그가 걷은 모든 발걸음마저 그들이 원하는 정보의 일종이었기에 저택의 고용인들도,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도, 심지어는 그의 상담사마저 믿을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총독은 여전히 일본을 위해 그가 모든 힘을 다해 작곡하기를 바랐다. 발버둥치려 해도 돈과 죄책감을 목줄로 잡은 그에게 은태는 목 안의 응어리를 삼키며 고개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가끔씩 그는 우울감에 빠졌다. 아마데우스는 그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래서 우울할 때마다 아마데우스는 술병을 들고 은태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술을 목구멍에 부어넣곤 했다. 숨이 막혀 미친듯이 몸부림 쳤음에도 아마데우스는 은태를 놓아주지 않았다. 죽음의 일환인지 아니면 그저 술기운인지 모를 것에 잡아먹혀 정신을 잃고 나면 못보던 악보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은태는 손을 덜덜 떨면서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모르는 악보에 아마데우스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적고 나면 그는 두 손을 모으고 정신없이 기도했다. 오로지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주님, 저는 쉬고 싶습니다. 제 미래는 소름끼칠 정도로 확실해서 전 두렵습니다. 감내해야 하는 존재는 오로지 나 자신 뿐이지만 전 이제 저조차 버거울 정도로 지쳐버렸습니다. 주님, 이 시험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너무나 연약하여……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견딜 수 없나이다.”





호화롭다 말할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 깔끔한 저택의 바닥은 외관과는 사뭇 달랐다. 은태는 충혈된 눈으로 자신이 찍어낸 악보의 첫 페이지에 ‘천황폐하의 은덕’ 이라고 적었다. 그의 입술은 메말라 있었고 만년필에서 힘없이 떨어지는 손길은 곧 죽을 사람 같아 보였다. 저택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고용주에게 그다지 큰 관심을 쏟지 않았다. 익숙한 정장이 보이자 은태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가져가십시오.”
“총독께서 다음 곡은 조선총독부의 위엄과 영광을 드러낼 곡으로 작곡하라고 하셨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 그딴 소리 이제 그만 할 수 없습니까!”

은태는 똑똑히 들었다. 그의 절규를 무시하며 비웃는 낮은 웃음소리도, 미치광이라며 속닥거리는 저택 사람들의 목소리도. 그저 수렁으로 떨어지고픈 마음이었다. 문을 쿵쿵대며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또 다른 무리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치켜세웠던, 그 뒤에서 시기하고 물어뜯던 음악가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은태는 모든 사람을 저택 밖으로 몰아냈다. 그런 중에도 사람들이 그를 마구 잡아당기고 손목을 잡고 안달을 했기 때문에 그의 모습은 처참할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풀어헤쳐진 옷을 추스를 틈도 없이 문을 잠가버리고 서랍 깊숙한 곳을 뒤지자 오래된 총 한자루가 나왔다. 우혁은 이것이 너무 낡았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쏘는 것보다 장식용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아무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은태는 그 총을 집어들고 자신의 턱에 겨누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그가 3년간 고대해온 순간이기도 했다. 속절없이 들려진 고개로 천장을 마주보았을 때 그곳엔 후광이 밝게 비치는 채로 샌들을 신은 양치기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그 그림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신이 그에게 그토록 잔인한 재능을 주었으므로 이 죽음 또한 그의 것이리라.

“좋아요, 죽을게요. 하지만 명심해. 당신이 날 죽이는거야!”

은태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오오 친구여 자네는 이것까지 생각했던건가. 그는 자신을 마음껏 비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잔혹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처참히 죽이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은태는 총을 멀리 던져버렸다. 우혁은 이것이 너무 낡았기 때문에, 그리고 정말 쏘는 것보다 장식용이기 때문에 그것으로는 아무도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은태는 커튼을 쳐서 저택의 모든 창문을 가렸다.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했던 미쳐버린 천재의 모습이 보이질 않자 하나둘씩 제 갈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보 하나를 받았다. ‘위독’ 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은태는 곧장 인력거꾼을 한명 불렀다. 이미 가난한 옛 동료에게 가 닿아있는 마음과는 달리 잰걸음으로 뛰어가는 인력거꾼은 느리기만 했다. 여인숙에 다다랐을 때 이미 우혁은 숨이 꺼진 뒤였다. 폐렴이라고 했던가. 의사는 은태를 알아보고서 짐짓 어려운 용어를 마구 뒤섞어가며 점잔을 뺐다. 그러나 은태는 우혁의 가는 길조차 배웅할 수 없었다. 그는 여인숙을 뛰쳐나와 집까지 달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음표들이 미친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은태는 머리를 부여잡고 오선지에 음표들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자신을 몰아붙였다. 그는 눈을 붙이지도, 음식을 먹지도, 물을 마시지도, 심지어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버린 듯 악보를 쓰다가 피아노를 두들기다가 또 다시 만년필을 잡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뇌 속에서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극한까지 갈 수록 음표를 한번 쓸 때마다 그가 경험하는 그 전율은 더욱 커졌다. 레퀴엠. 그가 중얼거렸다. 입 안에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지금 쓰는 이것은 우혁을 위한 레퀴엠. 아니. 아닌가? 음표가 사방을 날아다니는 중에 은태는 이 레퀴엠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야 했다. 이건 나를 위한 레퀴엠인가. 그의 손이 잠시 느려졌다. 그러다 곧 다시 빨라졌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그를 옥죌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겐가?”

지로는 이 천재 음악가의 집을 한번 둘러보았다. 깔끔했다. 그의 방을 빼놓고 말한다면. 음악가는 수많은 악보와 함께 바닥에 누워 있었다. 지로는 헛웃음을 뱉었다.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그가 참으로 한심한 인간처럼 여겨졌다. 지로는 그를 더욱 더 먼발치에서 보기로 결정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이가 언제쯤 일어날지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은태가 몸을 일으켰다. 언제 오신겁니까.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갈라져있었다. 지로는 은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지난 일주일간 아무것도 먹질 않았는지 얼굴이며 몸은 매우 야위어 있었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마구 구겨져있었다. 무엇보다 지로를 참을 수 없게 했던 것은 매우 지쳐보일지언정 은태의 창백한 얼굴에서 두 검은 눈은 맹렬히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로는 그런 눈빛을 싫어했다. 그것은 대일본제국의 신민이길 거부하고 날뛰는 불령선인들의 것과 꼭 닮아 있었다. 

“악보를 쓰고 있었습니다.”
“내 허락도 없이?”
“음악가란 전율이 생기면 따라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더군요. 그 찰나를 누군가 강요할 수도 없고 제가 마음대로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저는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해서 저는 이제부터 총독 각하를 위해 곡을 쓰지 않으려 합니다. 은태는 총독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총독은 자신의 앞의 선 청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그 정강이를 걷어찼다. 정통으로 다리를 맞은 그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총독이 낮게 쏘아붙였다. 고아인 것을 감사하라고. 은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못들은 것으로 하겠네.”
“총독 각하-”
“예술가 주제에 배가 불렀군!”

은태는 사정없이 날아오는 구둣발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렸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 꼴이라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니. 지금 그는 참고 있었다. 내 속의 분노를 모두 꺼낸다면 지금 이 작자를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총으로 내 턱을 겨눌 때에 이 자를 겨누었더라면 지금쯤 그는 죽지 않았을까. 은태는 휘청거리며 일어서서 총독을 다시 마주보았다.

“전 각하를 위해 그 어떤 곡도 작곡하지 않을겁니다.”
“……”
“이젠 저 스스로 인정받고 싶습니다.”

미치광이가 되어간다는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이미 총독도 알고 있을 것임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은태의 상담사와 긴밀한 접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총독이 코웃음을 치자 독한 담배 연기가 피어나왔다. 기침을 참았다. 총독은 껄껄 웃었다. 은태는 있지도 않은 총을 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어떻게 해야 그를 가장 빠르게 죽일 수 있을지 생각했다. 미친듯이 웃던 총독이 은태의 머리채를 그러잡았다. 아- 하고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린 음악가여, 이제 명심하게.”

자네의 모든 것은 다 내것이네. 그 위대한 음악도, 악보를 옮겨적는 이 손도, 찬란한 영감이 번득이는 이 작은 머리까지 -총독이 마치 은태의 머리를 터트려버리려는 듯이 꽉 쥐었다.-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나의 소유야.
총독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은태는 뒤돌아서서 총독의 집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총독이 말했다.

“그 문을 나서면 앞으로 자네에게 음악으로 돈을 주는 사람은 없을것이네.”

은태는 총독부 건물을 나섰다. 그가 걷는 길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뒤따랐다. 저주받은 운명이 이런 기분일까. 코트자락을 더 여미며 그는 한걸음씩 걸어나갔다.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어떤 거친 자들은 뒤로 침을 뱉고 아낙들이 귀엣말로 ‘저런 사람은 되지 말려무나’ 하고 아이들을 타일렀다. 은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나는 그저 음악을 사랑했을 뿐인데 어째서. 나는 그저 작곡을 했을 뿐인데 어째서. 나는 그저 하라는 대로 했을 뿐인데 어째서.
나는 그저 살고 싶었던 건데 어째서.
그는 자신을 변호하고 싶었다. 제발 그만하라고, 자신을 향한 잘못된 정의로 불타오르지 말라고 애원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지금 이때에 일본인 밑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저 죄인처럼 자신의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갈 뿐이었다. 멋모르는 동네 아이들이 던진건지 작은 조약돌이 머리에 맞았다. 뜨끈히 피가 흐르는 듯 하다. 어디선가 미치광이라며 노래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도 들린 듯 싶다……. 자신을 죽일 수단인 동시에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놓아버렸다는 것을 실감했다. 은태는 느릿느릿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궜다. 시계는 째깍거리며 돌아갔다.




다음날 류이치가 찾아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부유해보였다. 그는 자신이 은태를 일본인들의 상류사회로 이끌어주기 위해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지 털어놓으면서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물었다.

“총독부에서 명령이 떨어져서 자네 악보들은 이제 팔 수가 없게 되었네. 언뜻보니 소각하던데.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겐가?”
“…저는 그저……자유로워지고 싶을 뿐입니다.”
“굳이 그 방법으로 그렇게 했었어야 하나? 총독부는 아예 자네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해. 자네 같은 천재적인 작곡가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은 예술의 역사에서 굉장한 손실이란 말일세.”
“……”

류이치는 실망한듯이 돌아섰다. 은태는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도대체 이 천부적인 재능이 무엇이라고, 그저 신이 내려준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뭐라고 자신을 그렇게 옥죄는지 답답하기만 했다. 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시곗바늘이 돌아갔다. 저녁에 들르겠다던 이토는 오지 않았다. 그간 은태의 재능을 찬양하던 사람들 역시 아무도 오지 않았다. 미치도록 외로웠다. 저택은 빼앗겨 여인숙을 돌아다니기에 바빴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처음엔 그의 연주와 작곡의 재능에 감탄하다가도 그의 이름을 듣고 나면 싸늘하게 얼굴을 굳혔다. 문득 우혁이 보고싶어졌다. 은태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우혁의 무덤을 찾았다.

“…우혁.”

그는 깨끗한 묘비를 쓰다듬었다.

“나도 곧 자네 곁으로 갈 날이 멀지 않았나보아.”

그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렸다. 우혁의 무덤 옆에서 그는 죽을 작정이었다. 그래, 그는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아마데우스였다. 그의 첫번째 친구이자 끝끝내 그의 목줄을 쥐어버린 존재. 묘지에서 다시 돌아오는 발걸음 속에 그는 고민했다. 목을 매어 죽을까 독약을 먹고 죽을까 총으로 죽을까 그것도 아니면 떨어져 죽을까. 집에 돌아와 하릴없이 천장을 올려다보니 또 그 그림이었다, 온화한 표정의 신. 은태는 류이치를 찾아갔다. 그가 마지막까지 지니고 있던 악보를 모두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성냥도 가져왔다. 은태는 바닥에 빽빽하게 악보들을 늘어놓았다. 팔지 않고 아껴두던 악보와 류이치에게서 다시 되사온 악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그의 레퀴엠을 바닥에 깔았다. 성냥으로 그 중 하나에 불을 붙이니 매캐한 타는 냄새가 났다. 은태는 악보들의 중간에 누워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천장 위의 그림과 눈이 마주쳤다. 먼저 눈을 감은 것은 은태였다.

있잖아요, 난 이제 너무 지쳐버렸어요. 더이상 악보를 쓸 힘도, 피아노를 연주할 기력도 남아있지 않아요.
있잖아요, 난 너무 힘들게 살아버렸어요. 당신이 주신 이 권력이, 내겐 걸맞지 않았어요. 당신이라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당신도 나같은 사람이었나봐요. 난 너무 무서웠어요. 내 재능에 그렇게 많은 의미가 담길 줄, 내 재능이 돈과 권력으로 환산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아무래도 난 황금별을 가질 만한 사람이 못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음악을 연주할 때, 그때는 정말 좋았어요. 가난하더라도 그때처럼 행복하게만 지낼것을. 제 몸 하나 건사하겠다고 총독의 제안을 받아들인 내가 이제와서 할 말은 아니겠죠? 미안해요.
주님, 저는 이제 쉬고 싶습니다. 제 미래는 소름끼칠 정도로 확실해서 전 두렵습니다. 감내해야 하는 존재는 오로지 나 자신 뿐이지만 전 이제 저조차 버거울 정도로 지쳐버렸습니다.
주님.
이만하면, 잘 했던 겁니까?
이만하면, 잘 살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