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물어봐

바이트 미 3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다. 아니, 꽤 많다. 바잇미는 데뷔 이래로 최다 러브콜을 받아 편집국 언론사 이리저리 불려나갔다. 빗금 치듯 떨어져내리는 주가만큼 이 대표의 주름살이 솔찬히 늘어가는 고로 멜로 엔터 식구들도 그 음울한 분위기를 나눠갖지 않아서야 안 됐다. 그러던 게 바로 한 달 전이었는데. 전에도 은근하게 도소이를 금 송아지로 여기던 것이 이제는 눈에 보이는 결과로 증명되자 대표는 더욱 눈이 돌아 그녀를 신줏단지 모시듯 했다. 질문 좀 구린내 난다 싶으면 너네들이 카바 쳐. 악플이다 이상형이다 이런 거. 개인 질문은 어쩔 수 없는데, 웬만해서는 소이 먼저 말하게 둬. 그는 내친 김에 아주 인터뷰 컷 찍히는 구도까지 정해주더란다. 나머지 멤버들은 은은히 병풍 취급 당하는 주문에 불만이 많은 것과는 별개로 이에 진성으로 따지고 들 깜냥은 없었다. 어쨌든 그녀 하나의 성공이다. 그게 크다. 이대로 소리소문 없이 해체되면 어쩌나 싶던 은연 중의 불안이 대폭 해소된 터닝포인트에는 소이가 우뚝 서 있었으며, 나중에 일이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진 빚을 다 떨치기에는 이미 감당할 수 없이 무겁다는 점이다. 그러나 남은 멤버들의 숙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계면쩍은 기류를 티내면 안 되는 거고. 남의 인기를 염치없이 등에 업고 나오더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마냥 밝고 즐거운 척 얼굴에 철판을 깔고 웃어야 되는.


그러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저희 '한끼 먹자'가 정말 핫한 출연진분들로 화제인데요. 기사가 나오자마자 각종 커뮤니티 1위에 검색어 마비. 소이 씨는 벌써부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아셨나요?"

"소식이야 저도 아는 분께 들었지만 그때는 잘 실감이 안 됐어서,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대단하신 선배님들과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게 무척 얼떨떨한 것 같아요."

"세상에, 오백만 광고의 주인공이 겸손하시기까지 하네요."

"에이... 아니에요. 제 덕이라기보단 바잇미 멤버들이 여태껏 노력해왔던 게 이제서야 빛을 발한 거라고 생각해요."




말갛게 웃은 소이가 이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중에서도 우리, 리더인 여주 덕이 크고요. 그렇지 여주야?"




진행자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나로 미끄러졌다. 도마 위에서 재료를 다지다 말고는 주춤했다. 정신을 좀만 더 놓고 있었더라면 거뜬히 손가락을 베었을 참이다. 뚫린 옆엣귀로 대화의 행간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 끝이 곧장 이쪽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던 탓에, 발빠른 대답 대신 "아..." 하는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출연자들이 일렬로 서 있는, 살짝 둥글게 말린 일자형 식탁.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던져진 말이 연달아 귀에 툭 걸렸다. 소이 님이 아니라 여주 님이 리더셨어요? 되게 의외다. 말 몇 번 섞어보지 못한 어느 보이밴드의 멤버였다. 나는 양쪽으로 쏟아지는 달갑잖은 시선이며 말에 어떤 식의 리액션을 보여야 할지 눈을 굴리다가 결국 빙글 웃었다.




"꼭 그런 건 아니고, 누구 하나 고를 거 없이 다들 잘해준 거죠."

"소이 씨도 그렇고 여주 씨도 그렇고, 멤버들 간의 애정이 상당히 돈독해 보이네요."




연륜이 있는 그녀가 적당히 매듭 짓는다. 중앙 2번 카메라가 소이와 나를 줌인했다가 이내 제자리로 돌아간다. 애정, 돈독. 이런 거... 좋은 말이긴 한데. 내키지 않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그런 수식은 모두 동등한 상태에서 붙는 것들이 아닌가. 잘 풀리는 분위기에 자꾸 이런 생각으로 찬물 끼얹는 거 싫어, 싫지만. 앞 행렬에 깔린 조명에서 오는 열기. 이상하게 무뎌지는 손끝의 감각. 요리에 꽤 열의가 있는 배우 출신 조원이 양념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소매를 접어 걷은 팔 옆으로 잔잔히 물이 끓기 시작한다. 


그 다음 소이에게서 넘어가 등 뒤를 지나친 진행자의 발길이 멈춰선 곳은, 어쩌면 앞서 장렬히 늘어놓았던 '핫한 출연진' 이나 '화제' 의 증명이 되어주는 진정한 주인공이 아닐 리 없었다. 그 시점에서는 모든 포커스가 다 그에게로 맞춰져 있다. 정국 씨는, 뭐 말할 것도 없죠. 나날이 커져가는 인기에도 지난 1년간 자체 컨텐츠 외에는 방송 출연이 전무했는데, 이번 프로그램 출연을 결심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고작해야 한 번 호명된 이름에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관심. 그나마 가림막이 되어줄 사람이 지금은 저 멀리 가 있는 통에 옆눈은 본능에 이끌려 그쪽을 향할 수밖에 없겠다. 쏴아아 떨어지는 물소리. 중앙의 오목한 싱크대서 채소를 씻는 묵묵한 옆얼굴이 많은 생각을 했다고 보긴 어려운 명료한 답을 냈다.




"요리하는 게 좋아서요. 팬분들도 좋아하시고."

"어머, 요리를 좋아하신다는 건 좀 의외인데요? 뭐든 잘하는데 이런 것까지 잘하시면 너무 사기 아닌가요?"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좋아해요."

"요즘에는 요리에 관심 있는 남자라고만 해도 정말 큰 메리트죠. 안 그래요 여주 씨?"




칼이 무뎌서 다행이다. 이번엔 기어이 양파 대신 내 손가락 마디가 무참히 도륙날 뻔했다. 눈이 매워서 눈물 나는 게 아니라 자꾸 이리저리 치이고 불릴 때마다 심장이 얼큰해져서 눈물난다. 그래봤자 모두 내가 주가 아닌 상황들. 그 사이에 끼어 먼지처럼 한껏 분해되고 작아진 기분으로 얼쑤 그렇지 추임새까지 넣어줘야 한다니 이게 요리 프로그램인지 토크쇼 방청 출연인지 당최 가늠이 가지 않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진행자를 봤다가, 그 뒤의 정국을 봤다가, 웬걸 덥석 눈이 마주치고 또 희게 까진 양파 등어리를 봤다가... "아, 네, 맞아요." 하고 마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최선이다. 왜, 들떠서 오바하는 쪽보다는 있는 듯 없는 듯 한 듯 안 한 듯 실오라기 같은 대답이 백만 배 낫잖아. 다행히 한 마디로 별 군더더기 없이 돌려지는 이목이다. 그 후론 진정된 마음으로 재료를 마저 손질한다. 뒤늦게 돌아온 조원에게도 유연하게 티키타카를 나눈 진행자가 만족한 듯 다음 먹잇감을 찾아 유유히 떠났다. 떠났는데.


여태 시선을 떼지 않은 정국이 역방향으로 척척 걸음한다. 옆에 불쑥 나타나서는 썰고 있는 칼끝을 잡아챈다. 




"저기요."

"어..."

photo

"양파 썰 때 손가락도 같이 썰어요? 원래?"




...그럴 리가.







Bite Me

W. 연망








"어쩌다 그랬어요?"




유제가 밴드를 갈아끼워주며 물었다. 하필이면 약통에 밴드가 다 떨어져서 이런 유치한 것밖에는 없다고 했다. 나는 나름 마음에 든다는 식으로 천장에 손가락을 높이 치켜들었다. 노란색 캐릭터 밴드가 빛을 받아 겉에서부터 발광한다. 




"별로 티 안 나지?"

"네... 잘 가리면 티는 안 나지만."

"그럼 됐어."

"아이, 된 게 아니고요. 어쩌다 다쳤냐니까요?"

"몰라, 나도 몰라. 몰라 몰라."




집요한 추궁에 나는 세살배기 애처럼 안무실에 대 자로 철퍽 누웠다. 동생들 앞에서 몇 안 보이는 모습이지만 유제는 벌써 질린다는 눈으로 아래를 본다. 그렇게 한동안 뚱한 채로 있다가 굽혔던 무릎을 피고 벌떡 일어난다. 됐어요, 소이 언니한테 물어보면 되지. 나는 누운 자세로 멀어지는 그녀의 틱틱대는 발뒤꿈치를 보며 쟤는 어쩜 저렇게 거짓말도 어설프게 할까 생각했다. 요는 어제 둘이 나란히 방송 나간 뒤에 생긴 상처고, 이쪽은 순순히 불 생각이 없어 보이니 다른 구석을 노려보겠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도소이가 어디 그런 거 말해줄 위인이냐. 심지어 자기 일도 아니고 서여주 일을. 유제도 그거 알고 괜히 신경 거스르는 선택 하지 않을 지성이 있다. 검지에 붙인 밴드를 만지작거린다. 딱히 숨길 거리는 아니지만 자랑할 일은 더더욱 아니니까 말하지 않는 편이 훨 낫지 않나 싶은 거다. 약 바르는 것도 혼자 할 수 있는 걸 어쩌다 유제에게 들켜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좀 깊게 베이긴 했어. 아프다. 아픈데, 누가 아프지 않냐고 하니 더 아픈 기분. 나는 그런 걸 못견뎌했다.




프로그램 예고편이 나왔다. 30초짜리 짤막한 길이다. 차례로 누구입니다 하는 씬은 메인들 거만 넣어주고 나는 그외 출연자들 후다닥 넘어가는 캡쳐 컷으로 소개된 게 다였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혹여 설명란 눌러 출연진 크레딧까지 줄줄 펼쳐본 후에야 내 이름이 나올까 노심초사 했더니만 방송사 그런 배려는 있는 모양이다. 조회수 십만 뷰 돌파로 나름 선방했으나,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은 전부 현실. 일단 인기순부터 최신순까지 야금야금 장악한 빌립 팬들의 비중이 압도적이고 그 외에는 소이 광고에 안면이 있는 팬 아니면 일반인의 언급이다. 눈에 띄는 건 이 둘뿐이고, 나는 기대도 않았으면서 왜인지 뒷맛이 쓴 감상으로 뒤로가기 버튼을 누른다. 그래, 여기까진 좋아. 좋다고. 문제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따로 어디 광고건 스케줄이 있어 미리 찍어둔 소이를 제하고 컨셉포토 촬영장에서 넷끼리 한 의자에 구겨앉아 봤다. 1화 본방. 소이랑 나 나올 때 멤버들은 오 했고 정국 나올 땐 한설이 특히 왁, 했다. 그후로 쭉 여상하게 보던 차에, 하단바가 거의 끝물로 향해갈 즈음, 다연이 문득 그렇게 묻는 것이었다. 




"언니. 소이 언니 옆에 있었어요?"

"응."

"근데 왜 이렇게 내내 안 보여요."

"......"

"야,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나는 언니 목소리 들리는데?"

"보이는 거랑 들리는 거랑 다르지."




할말을 잃은 나를 두고 유제가 그녀의 허벅지를 찹 때리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또 한설이,




"아니, 설마 여주 언니 분량 다 편집된 거예요?!"

"......"




크리티컬. 디 엔드. 나는 본질을 꿰뚫는 그 한 마디에 마지막 영혼까지 탈탈 털려 한설에게 맥없이 휴대폰 지지대의 역할을 물려주고 잠시 자리를 비켰다. 머지않아 뒤에서 알게 모르게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뭘 싸워. 맞구만 통편집. 처음에야 뭔지 모를 분통과 씁쓸함이 지배적이었으나 촬영장 나와서 바람 좀 쐬고 보니 더없이 현실적인 사고가 되살아난다. 이래서 뭐든 잡아야 한댔구나, 대표가. 특출난 게 없으면 인지도라도. 내가 뭐가 없는 인간이면 남이 가진 걸 빌려와서라도. 전에는 마냥 지독하게만 느껴졌던 그 말이 어째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기 시작한다. 방송은 방송일 뿐이고, 내 본업이야 늘상 충실하게 밀고 나가면 아이돌로서의 본분은 충족되는 것이지만 서여주로서의 본분은 다 지지 못한다. 집에서 온 전화를 받을 낯이 없다. 어찌 됐든 성공해야 했다. 그러니 이 정도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야 할 때가 있다면, 그건 여전히 지금일 것이다.




배우며 아이돌이며 좀 뜬다 혹은 떴다 싶은 연예인들은 죄 불러모은 탓에 한번에 날 잡아 소집하기가 번거롭다. 촬영주기가 굉장히 늘어진 것도 그 이유에서다. 때문에 1화가 세상 밖에 나오게 되었을 시점에도 2화 촬영을 시작도 못하고 있었는데, 기사 내보낼 때부터 1주 간격이 아니라 2주 간격 방영으로 공표를 해놓은 덕에 촬영분 만들 시간을 벌었다. 감독은 알찬 출연진이란 치트키를 썼지만 의심 많고 짬바 찬 사회인 답게 이가 많이 흥행하지 못할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일정을 드문드문 벌려놓은지라 프로그램 첫 화만에 시청률이 13프로를 찍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더 조밀하게 짤걸 후회했다고 한다. 방송 나간 뒤로 정국의 팬덤은 예상대로 난리가 났고, 소이의 차후 예능 출연 제의가 더 들어왔으며, 나는 왜인지 전보다 조금 더 유명해져 있었다. 아주 실낱만큼. 마지막 장면에, 하마터면 손가락이 잘릴 뻔한 장면에서 정국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멤버들은 꼭 사고가 있어야지만 얼굴 비춰주냐면서 애꿎은 감독이나 편집자에게 씩씩댔는데 나는 그것도 아니라고 봤다. 혼자 조용히 손 잘렸어도 안 될 놈은 쳐다도 안 봤을 것이고, 될 놈인 정국이 뭐라 말을 꺼낸다면 그게 얼마나 시덥잖은 말이든 알아서 포커스 맞추었으리라고 말이다.





Bite Me





"소이 언제 내려온대? 여주가 확인해 봐."

"아, 네."




도로 인적이 드문 새벽녘. 평소보다 더 조급해 보이는 매니저 언니가 운전석 뒤를 돌아 손짓했다. 나는 차문을 열면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길다. 도저히 끊어질 기미가 안 보여 빠른 걸음으로 숙소까지 다시 올라간다. 백색 현관등이 팟 켜지는 신발장. 다시 신기도 어려운 끈 부츠를 벗어던지고 보이는 건 어두운 가운데 유일히 밝은 빛을 토해내는 누군가의 드레스룸이다.




"지금 나가야 돼."

"4시 40분이라며."

"40분 한참 지났어."

"그게 뭐. 매니저 원래 시간 당겨서 말하잖아."

"소이야."




벽에 인테리어로 붙은 거울 앞에서 흰색 블라우스와 밤색 니트 가디건을 대어 보고 있던 소이의 시선이 건조하게 꽂혔다.




"오늘 컴백일이야."

"......"

"우리... 잘해야 돼. 정말."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가끔은, 정말 가끔은 도소이가 덜 그녀다웠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입장에, 오히려 언제든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소이는 밭은 한숨 뒤로 양손에 든 옷걸이를 탁, 바닥에 던져놓고 입은 옷 위에 베이지색 코트를 걸친다. 뒷목께 흘러들어간 긴머리를 빼내며 내 옆을 스쳐지나간다.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가니 타이밍 좋게 매니저 언니에게서 온 전화. 받으려던 찰나에 먼저 가던 이가 뒤돌아 쏘아붙인다.




"서여주 너나 잘해. 남 시중 드는 게 네 일이니?"




손에서 끊기지 못한 진동이 벨소리에 맞춰 간헐적으로 울려댔다. 소이는 그대로 출입문을 빠져나간다. 덜렁 남겨진 나도 얼타다 곧 뒤를 쫓는다. 무슨 소린지 헤아릴 틈도 없이, 아니 어쩌면 그럴 기력도 없이, 모두를 태운 벤이 희뿌연 매연만을 남기며 어스름한 새벽을 갈랐다.





Bite Me





컴백 무대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생각이 안 나. 머리가 마비다. 몸을 갈아냈던 지난 연습이 무색하게 막상 당일에 당도하게 되자 발끝부터 서서히 굳어간다. 이런 정신으로 리허설은 또 어떻게 하고 왔는지가 의문이다. 다행히 막내력 넘치는 한설이 중간에서 분위기를 띄우고 다연이 답지않게 유순히 따라준 덕에 압박감은 쉽사리 풀어졌다. 마지막으로 헤어 손질을 받는 소이는 아까 한번 크게 받아친 후로 그다지 응어리가 남아 있는 것 같지는 않게 보였지만, 그거야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빌립 선배님들도 음방 온다는데. 여기는 다음주부턴가? 나는 살짝 밀려오는 졸음에 굼뜨게 있다가 그 말에 돌연 정신이 들었다. 맞다, 컴백 시기 겹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방송사 여섯 곳 중 한 곳에서만은 1위를 노릴 수 있겠다 싶었던 건 당연히 빌립이 나란히 컴백하게 된다는 조건을 빠뜨린 전제였다. 1-2주 짧은 프로모션 기간. 도는 루트는 거진 똑같을 텐데. 아무리 초동 성적이 대폭 상승했다 하더라도 이 상황에서라면 이대로 1위는 커녕 순위권에도 들지 못할 가능성이 만무했다. 빌립 말고 다른 쟁쟁한 그룹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여주 언니, 무슨 생각해요?"

"어? 아, 아니."

"활동 기간에 양배추만 먹는 거 진짜 헬이지 않아여? 아아, 벌써 배고파. 쓰러진다 쓰러져요."




대기실 소파에 바짝 붙어 앉은 한설이 이마에 손을 올리며 가련하게 앓는 체 했다. 속으로는 심각한 와중에도 그게 웃겨서 힘없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안 돼, 우리 무대 나가야 돼-. 어깨를 툭 치며 웃자 한설은 소파 등받이에 느슨하게 기댄 채 고개만 슥 돌린다. 잘할 거예요. 반응도 좋고, 다들 열심히 했잖아요. 고등학교도 채 졸업 못한 애가 간혹은 어른보다 더 나은 모습을 하곤 한다. 나는 뭐라 할말을 고르지 못하고 네일 큐빅만 매만지며 바닥을 쳐다봤다. 열심히 했지. 그걸 모르는 건 말이 안 되고. 다만 지금 내가 두려운 것은, 우리 그룹의 바람과 내 바람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분에 넘치는 욕심이 나를 갉아먹기도 모자라 멤버들에게까지 좋지 않은 파장이 될 수 있다는 것. 지금만으로도 너무 행복에 겨운데, 나는 왜 계속해서 그 위를 보게 될까. 나만 바닥에 있는 것 같이. 큐빅이 틱,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대기실의 문이 열린다. 다음 무대하러 가실게요. 바쁜 관계자가 그렇게 낭송하고 옆으로 비켜 섰다.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튀어오른 한설이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벌써 시간 됐네? 우리 이제 가요."

"응, 가자."





Bite Me





하늘빛 응원봉을 든 구역이 이전 컴백보다 더 넓어진 기분이다. 무대하면서 느꼈다. 앞줄에 포진한 대포 카메라도 부쩍 많아졌고, 또... 다른 연예인을 보러 온 사람들도 생각보다 바잇미의 무대를 즐겨주는 듯했다. 그거야말로 다행인 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멤버 중 하나가 말했다. 이번에는 방청 더 오신 것 같은데? 똑같은 생각을 하는 걸 보니 내 기분 탓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손에만 열이 모여 급히 다른 손으로 바꿔 쥔다. 한 발 한 발 복도를 내딛는 걸음이 진짜 같지 않다. 급기야 벽에 기대어 조금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로는 아닌데 몸에 힘이 죽 빠진다.


그렇게 정신없이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아 예, 안녕하세요."




아마도 사녹 다음 차례일 빌립을 만났다. 다음주라 하지 않았던가. 그렇잖아도 내심 다음주이길 빌었는데... 먼저 호기롭게 인사하는 한설을 필두로 다들 허리를 재깍 접었다. 접때 회사에서 마주쳤던 날처럼 한가로이 담소 나눌 상황은 아니라 다들 인사만 하고 각자 위치로 빠르게 빠진다. 그 와중에 봤다. 짙은 눈썹이 드러난 반깐 머리를 하고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가죽 자켓을 걸친, 평소보다 진한 메이크업을 한 정국을. 보려고 본 건 아닌데, 그렇다고 기를 쓰고 안 보려고 했던 것도 아니지마는, 눈에 띄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을 보지 않는 건 어지간해선 의지의 영역이 아니지 싶다. 근데 저 사람은 대체 뭘 보고 있었던 거지. 나는 방금까지 정국이 물끄러미 훑고 지나간 곳을 뭔가 하고 쳐다봤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왼손. 내 왼손.




"... 아."




상처는 흉 안 지고 다 나았다. 그땐 그렇게 바보 등신 취급 했으면서,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