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1942년 5월 4일
눈을 뜨니 몸에 배인 푹신함이 느껴졌다. 그에 비해 얼굴에 닿는 다정한 손길은 퍽 낯설기만 했다. 눈을 뜨자 코하루가 탄성을 뱉어냈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야마토를 꽉 끌어안았다.
“당신을 잃은 것 같아요. (당신을 잃은건 줄 알았어요.)”
코하루의 다정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말했다. 야마토는 겨우 상체를 일으켜 코하루의 가녀린 등을 쓰다듬었다. 익숙한 향기가 끼쳤다. 은은하고 세련된, 코끝에서 달콤하게 흩어지는. 코하루는 야마토를 여전히 꽉 안은 채로 소리 내 울었다. 그녀의 어깨가 마구 들썩거렸다. 그 등을 여전히 품에 안은 채로 토닥여주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혹시 싫어진건가요?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나만을 바라봐달라고 하지도 않을게요. 하지만…그렇지만…내가 당신을 사랑하는것만은 허락해줘요. 나 때문에 당신의 몸을 해치지 말아요. 자신을 죽이려고 하지 말아요.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문장을 달래며 야마토는 코하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침 창틈을 비집고 들어온 봄날의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범규는 사랑스럽게 내려온 잔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네… 입니까?(네…?)”
“유감스럽지만,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습니다.(애석하게도 난 당신과 혼인할 수 없어요.)”
“왜요?(왜죠?)”
“나는 그런 자격이 없는 녀석이니까요.(난 그럴 자격이 없는 놈이라서요.)”
“……”
코하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가슴이 저며왔다. 그러나 이것이 코하루를 위한 최선이라 생각하며 범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더 좋은 남자를 만나세요. 당신을 첫째로 사랑해주는 남자를 만나요. 이번 봄 햇살처럼 따뜻한 남자를 만나고, 나 뭔가 눈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사랑을 하세요. 깨끗한 것만을 붙잡고 사랑한다는 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토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사랑받으면서 언젠가는 서로 질투도 하고 헤어져도 보고 끝나는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는 꿈을 꾸면서 매일 행복을 자요. 이 봄볕처럼 따스한 남자를 만나서 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행복한 사랑을 해 잠들어요. 당신은 그럴 가치가 있어요.)”
범규는 잠시 수빈을 생각했다. 그리고 코하루의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 어떤 남자를 만나려면 당신은 너무 아름답고 선하고 눈부신 사람이니까요.(나 따위의 남자를 만나기에
“… 내가 모르겠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모을 것 같나요?)”
코하루가 원망하는 눈으로 범규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눈물을 닦아주는 범규의 손을 쳐낸 채로 말했다. 그럼에도 짓는 일그러진 웃음은 작별일까 각별일까.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범규는 코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당신이 본 적도, 발을 디딘 것도, 나라를 왜 그렇게…. (어차피 당신이 본 적도, 발을 디뎌본 적도 나라를 왜 그렇게…)”
지키려고 애를 쓰는건가요? 아버님께 다 들었어요, 불령선인과 어울려 다닌다고. 당신이 그렇게…끔찍한 일을 한 것도 다 그 불령선인들이 부추겨서……. 범규는 코하루의 보석 같은 눈에서 몸에 밴 경멸을 보았다. 코하루는 범규를 이해할 수 없었고 범규는 코하루를 이해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맺어질 수 없는 것은 이같은 이유였다.
“조선은 약하고 그 약점 때문에 일본에 멸망했습니다. 그 나라의 부활을 왜 당신이 도와야 하나요? (조선은 약해서, 그 나약함 때문에 일본에 멸망당했어요. 그 나라의 부활을 왜 당신이 도와야 하죠? 왜 하필
“小春。(코하루.)”
간호해줘서 고마워요. 당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서 더 고맙고 과분하고. 이제 가서 쉬어요. 이 얘긴 나중에 합시다. 범규가 말했다. 코하루는 조용히, 그러나 확연한 슬픔을 안고 일어섰다. 한숨을 쉬었다. 옆에 놓인 셔츠를 집어든 범규는 천천히 단추를 잠갔다. 봄볕이 얼굴에 따스하게 내리쐬였다.
_1942년 5월 2일
미라보 호텔이 발각되어 폐쇄된 이후 다음 기지로 카이의 교실이 채택되었다. 본래의 기지보다 확연히 작았으나 그곳만큼 안전한 곳은 이제 없었다. 카이의 강력한 의견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안의 공기는 과거 결연함에 들떠 있던 호텔의 방과 달랐다. 싸늘하게 내려앉은 침묵은 청년의 낙망이요 차가운 분노였다. 태현은 의자에 앉았다. 단체 규칙에 따라 범규는 회의에서 제외되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참석하였다. 수빈을 빼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할 듯 합니다.”
태현이 말했다.
“현재 우리가 해야할 것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만주로 독립자금과 화기를 안정적으로 조달하는 것이요, 둘째는 재작년 12월부터 계획한 조선총독부 폭탄 의거를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수빈이는?”
남준이 날카롭게 물었다. 태현은 남준을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
그가 빠르게 사과했다.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태현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떠밀리듯이.
“셋째는…최 동지의 석방입니다.”
“그것보다 먼저인 일이 있을텐데.”
태형이 말했다.
“단체를 팔아넘긴 여우 새끼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냥 사실대로 말하지. 친일하는 아버지가 있는 놈이 못마땅하니 죽이고 싶다고.”
연준이 말했다.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아물지 않은 고문의 흔적이 잔인할 정도로 남아 있었다. 억지로 빠진 손톱은 아직 자라지 않았으며 머리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고 밝은 전등에 조금씩 비치는 몸의 윤곽에서 서슬퍼런 멍이 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풍채는 당당했다.
“지금 그를 감싸는 겁니까?”
“그러는 그대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비방하기만 할건가? 기꺼이 조선의 개가 되겠다 한 자를-”
태현이 책상을 탕 치고 일어섰다.
“주인을 문 개가 또 다시 물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
“한번의 불미스러운 일로 그리 노여워 말란 말이야. 사정이 있었겠지. 어차피 최 동지를 그곳에 홀로 남겨둔 우리 과오도 크지 않나.”
“그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주인을 물었습니다, 출생부터 조선을 등졌다고요!”
확실한 경멸과 분노에 연준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나서서 될 것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단원의 체포에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연준은 태현의 분노에 낯설어 했다. 잘 벼린 칼 같이 날선 태현의 신경은 그 주인을 어딘가로 내몰고 있었다. 칼은 섬뜩한 일본군가를 불렀고 총은 그 아가리를 향할 곳을 찾지 못했다. 연준은 타고난 습성으로 그것을 꿰뚫어 보며 태현의 작은 우월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꺾일지언정 휘지 않는 올곧은 대나무. 그러나 그것은 행군하던 일본군의 장검 하나에 맥없이 빈 몸을 내보이기 마련이었다. 꺾일지언정 휘지 않는 올곧은 대나무. 그것은 엄동설한에 마구잡이로 베어진 채로 바닥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썩어가기 마련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입니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지민이 서둘러 묻자 태현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의 총명한 눈이 다시금 불타오른 학구열로 빛났다.
“경성에 학당을 세우려 합니다.”
지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합의된 내용이었다.
“그런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협동학교(1907년 경북 안성에 설립된 학교. 일제의 탄압으로 1917년에 폐교 되었다.)도. 신민회, 서북, 호남, 기호 학회도 모두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하고 끝났어.”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우리가 해야 하는거야. 우리 모두 어떠한 방면에서든 가장 신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 아니겠어?”
“난 빼주지 그래.”
“너야말로 동경까지 간 새끼가 왜 그러냐?”
웬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태형을 지민이 달랬다. 태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교사는 휴닝 동지, 그리고 지민 동지. 이렇게 두 분이 맡기로 하였습니다. 혹 더 자원하실 분 계십니까?”
“저도 하죠.”
남준이 손을 들었다.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형이 저만치서 찌푸린 표정으로 손을 들었다. 과목은 각각 음악, 영어 및 수학, 국어로 정하겠습니다. 남준 동지께서는 연전 국문학과를 전공하셨으니 지민 동지와 함께 국어 과목을 맡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저는 말모이 활동의 일환으로 국어수업마다 참여할 예정입니다.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 모집은 어찌할까요? 남준이 물었다.
“아마 보를 붙일 것 같습니다.”
태현이 대답했다. 정국이 손을 들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아니…뭐 별건 아닙니다…! 정국이 말했다.
“저도…다니고 싶습니다! 그…학당이라는 것 말입니다……”
정국이 우물쭈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어렴풋이 웃음을 지었다. 배움에 목마른 소년을 거부할 학당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그 문제에 대해 상의해 보려 하였습니다. 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요즈음의 학교를 다니기에는 위험하니까요. 그가 쓴 약을 먹는 것처럼 덧붙였다.
“전 동지.”
잠시 바람을 쐬겠다며 나온 정국의 등 뒤에서 태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국은 등을 돌려 태현과 마주보았다. 태현이 정국이 기대고 있던 난간에 기대 턱을 괴었다.
“월송 동지께 아직 많이 서운하십니까?”
“어떻게 아셨습니까?”
소스라치게 놀란 정국에 태현은 피식 웃으며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평소에 활발하던 동지답지 않으니까요.”
정국은 손톱을 괴롭혔다. 어둑어둑한 밤거리가 조용했다.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더욱 서러워지는 것이었다. 윤기는 전투가 일생의 사명인 것처럼 굴었다. 총과 화약, 그런게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것 처럼. 그런 윤기를 보며 정국은 마치 연준이 담배에 그렇듯 윤기 또한 전투에 중독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전쟁터에 잠식된 지 오래였다. 만일 죽더라도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할 것이다. 그저 어느 이름없는 병사들처럼 소나무 숲에서 달빛과 함께 뼛가루가 산산히 스러지겠지. 그리고 그것은 정국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이 아닌 삶은 한번도 살아보지 못해서, 말을 배울 때부터 어머니, 아버지보다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아이라서, 그에게 전쟁터는 짧은 일생의 전부였다. 어쩌면 그래서 학당을 다니고 싶어 했는지도. 한번쯤은 그저 교복을 입고 벗들과 노니며 어여쁜 여학생을 보고 수줍어하고 밤잠 꼴딱 새워가며 숙제를 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약이 지긋지긋했다. 경성에 오니 그것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만주에 더는 남지 않겠느냐 물으면 그때는…
“어차피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그래서 짧을 줄 알지만 그래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배운다는거 말입니다. 투박한 말투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태현은 정국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모든 것이 두려울 나이다. 아니, 모든 것을 두렵게 만드는 시대다. 그리고 그를 느끼는 사람은 한사람이 아니었다.
남준은 형무소 앞에 섰다. 두번다시 오고 싶지 않았던 곳인데. 야속하기가 짝이 없었다. 굳은 빨간색 벽돌담을 뚫고 나오는 누군가의 비명소리는 남준을 비참하게 했다. 면회를 신청하자니 막막했다. 이토록 싸워본 적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저 막연히 형무소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남준은 여러번 심호흡을 했다. 들어갈까 말까 여러번 발걸음을 옮기다가 결국에는 은행나무에 기대어 억울한 봄바람을 맞았다.
“수빈아.”
목이 메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죽지 마라?”
생애를 대한을 위해 바치겠노라 살아왔다. 수빈이 그를 그렇게 보았듯이 남준은 저 자신이 불 같다는 생각을 했다. 벗이든 적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태워버리는 불. 그가 태워버린 것들에는 한때 그가 사모해 마지않던 문학도 있었다. 양이들의 속담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도대체 글이 무엇이길래 그토록 강한건지 알고 싶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옆집 김 씨 아저씨가 일본 헌병 칼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던 소년 시절은 멋모르고 문학에 발을 들였다. 먼녘의 작가들을 선망한 다음에는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열망이 어린 청춘을 감쌌다. 하지만 결국 그 열망의 대가가 무엇이었던가. 나약하게 문학을 좇던 그는 결국 동료의 체포, 그리고 배반을 경험해야 했다. 문학은 연준이 도축된 양의 꼴이 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엔도 야마토가 동지들을 밀고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문학은 수빈이 단지 그 시간에 그곳에 있었다는 이유로 잡혀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젠 무엇이 힘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 저를 이끌어주는 힘, 문학의 힘. 그것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문학이란, 결국 그는 결론을 내려야 했다. 문학이란 그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허황된 꿈으로 인도하는 것 뿐이다. 아냐. 아니다. 남준은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이것은 그가 원한 결론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림없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문학의 부정이었다. 수단이다. 문학이란 도구이다. 방법을 실행하기 위한 도구. 폭탄 의거를 실행하기 위한 홍커우 공원의 천황 생일연 입장권. 결코 그것이 방법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독립을 갈망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남준은 자문했다.
문학이 힘없는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데 쓰일 수 없다면, 이 고난의 시대에 뜬구름 잡듯 그것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이 옳은 일이던가. 대한의 남아로서 그것이 진정 정도(단지道)라 할 수 있던가.
남준은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맥없이 수빈의 이름을 거듭하여 부르며 고뇌하여 체념으로 불꽃이 서서히 멎어갈 적에 경성에는 소낙비가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