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3
“···teachers' room*에서는 조용히 해야 해. 알겠지?”
(교무실)*

“응, 조용히.”
둘이서 나눈 대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내내 먼저 말을 걸어봐야 하나 전전긍긍하긴 했다. 하지만 전학생은 학교의 곳곳을 탐색하기 바빠 보였다. 굳이 말을 붙일 정도로 어색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잘 따라오고 있는지만을 간간이 확인하며 발을 놀렸다. 교무실 앞에 도착했을 무렵, 난 혹시나 몰라 조용히 해야 한다는 당부를 해주었다. 전학생은 그 말에 싱긋 웃었다. 제 입술에 가져다 댄 전학생의 검지가 장난스러웠다. 너무 당연한 건가···. 왠지 머쓱해지는 기분을 눌러 담고서 문고리를 끌었다.
교무실의 문이 열리자마자 시원한 공기가 훅 끼쳤다. 안의 풍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와 학생과 얘기를 나누는 선생님들, 또 프린트한 유인물을 가지고 바삐 움직이는 몸짓. 우리 담임 선생님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자신의 얼굴을 반 가릴 정도의 유인물에 파묻혀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를 발견했는지 천천히 다가왔다. 나를 본 담임 선생님의 입주름이 펴졌다.
“마침 여름이가 왔구나! 안 그래도 짐이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네? 짐이요?”
“그래. 전학생 교과서들이랑 교복 말이다.”
담임 선생님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이걸 한 번에 다 어떻게 가져가라고 준 건지.”하는 구시렁거림은 덤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책상 위에는 교과서들이 촘촘히 올라가 있었다. 탑처럼 쌓여있는 교과서는 물론이오, 교복에 체육복까지 담긴 봉투도 보였다. 그제서야 아까 들었던 담임 선생님의 말이 백 번 천 번 이해가 됐다. 애써 경악한 표정을 숨기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 눈에 들어온 전학생은 마냥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저게 다 본인 거라는 건 알 텐데. 이상했다.
“보다시피 가져가야 할 게 좀 많아."
“그러네요. 제가 좀 도울까요?”
“고맙다, 여름아. 나중에 당 떨어지면 선생님한테 오렴.”
“넵!”
당찬 내 대답에 담임 선생님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짐들을 슬쩍 우리 쪽으로 밀었다. 책상 꽂이에서 교사용 교과서와 파일을 꺼낸 담임 선생님이 먼저 자리에서 떴다. 난 우두커니 남겨진 교과서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다음으로는 바닥에 놓인 봉투를 들어 의자에 올렸다.
“제이, 내가 교과서 반 가져갈 테니까···.”
“응?”
“···어?”
상황 파악을 못 한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방금 전까지 책상 위에 있었던 교과서들이 전학생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내가 놀란 건 단순히 전학생이 교과서를 들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 많은 교과서들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는 모양새 때문이었다. 서양 애들은 골격이 크니 그만큼 힘도 센 건가 싶었다. 전학생이 의자에 올려둔 봉투까지 가져가기 전까지 말이었다. 벙찐 내 얼굴을 보고 전학생은 물음표를 띄웠다. 정작 본인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늠아, 왜 그래?”
“아니···. 너 안 무거워?”
“응. 괜찮아.”
“그래도 나도 좀 들게. 계단도 올라가야 하잖아.”

“진짜 괜찮은데···.”
전학생의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미처 표정을 숨길 새도 없이 아쉬워하는 게 보였다. 왜 저렇게 미련이 남은 듯 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들어주면 힘쓸 일도 줄어드니까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미국에서 흔히 말하는 레이디 퍼스트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그게 사실이라면 전학생의 호의를 무시하는 꼴이 된다. 풀이 죽은 전학생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있잖아.”
“···응?”
“조금은 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주 조금.”
“조금?”
“어. 여기까지 왔는데 나 혼자 빈손으로 가기도 좀 그렇고···.”
딴 곳을 쳐다보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곁눈질로 전학생의 반응을 살폈다. 전학생의 처져 있던 꼬리가 다시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다시 책상에 교과서 꾸러미를 내려놨다. 반으로 나누겠지 싶은 마음에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학생은 교과서들을 이리저리 들추며 애를 쓰기만 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열중하고 있는 탓에 말리기도 애매했다. 곧 전학생이 교과서들을 건넸다.

“고마워, 늠아.”
”···이것만 들어주면 돼?”
"응. 무거워요?"
(무거워?)
”아니야···.”
전학생이 내어준 교과서는 총 세 권이었다. 기술 가정, 체육, 통합사회였다. 미치겠네. 아까 교과서를 정신없이 들춰본 이유가 가벼운 교과서를 찾기 위해서였나 보다. 수학과 국어의 반도 안 되는 두께의 교과서를 들어 올렸다. 교무실을 빠져나오며 전학생의 품에 안긴 교과서들을 힐끔 쳐다봤다. 안 그래도 가벼운 교과서가 더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교실이 멀게 느껴진 적은 또 처음이었다. 전학생이 들고 있는 교과서의 양과 내가 들고 있는 양이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런 듯싶었다. 게다가 전학생은 봉투까지 들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누구라도 이 상황에 떨어진다면 나와 똑같을 게 뻔했다. 계속 이렇게 눈치를 보진 않을 테지만···. 전학생은 여전히 궁금투성이인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나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주변을 살피는 텀도 줄어들었다. 지금처럼 전학생이 나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뭐 궁금한 거 있어?”
“응.”
“뭔데?”

“미국, 언제··· 온 거야?”
전학생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조례 때 담임 선생님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긴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저와 공통점이 있는 애가 있으니까 반가울 만했다. 사막 속에 오아시스를 찾은 기분이겠지. 대답을 하지 않고 전학생에게 눈을 흘렸다. 여기서 내가 반응한다면 친하게 지내려고 할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닥 달갑지 않았다. 전학생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지도 못했다. 당최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어렸을 때여서 실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아마 10살쯤 일 거야.”
“10 years old···. 응, 알겠어.”
전학생은 무언가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질문 세례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일까, 전학생의 의외의 반응에 되려 당황한 건 나였다. 저 웃는 얼굴에 무슨 생각이 담겨 있는지 알 길 없었다.
“저기, 학교에 대해서는 안 궁금해?”
“응. 괜찮아.”
“미국이랑 다른 부분도 있을 텐데 알아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중에, 늠이가 해줘.”
“내가? ···내가 나중에 알려달라고?”
“으응, 늠이가.”
당했다. 전학생의 쑥스러운 목소리를 듣자마자 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이제 보니까 전학생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제 몫을 톡톡히 챙겼다. 그 몫을 왜 나한테서 챙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 속으로 한숨을 뱉었다. 그냥 김태형 같은 애···. 아니, 김태형보다 더 순진하고 어찌 보면 영악한 애가 한 명 더 생겼다고 생각하자. 이제는 자기합리화를 하는 지경까지 갔다.
그렇게 말없이 복도를 거닐던 중, 전학생이 퍼뜩 몸을 떨었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처럼 눈도 바둑알 마냥 커져 있었다. 왜 이러나 싶어 소리 없는 물음을 던졌다. 당연히 그 물음을 들었을 리 없는 전학생은 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교과서 위에 마이쮸 하나를 올려놨다. 처음에는 내가 교과서를 들고 있는 것을 까먹었는지 손에 쥐여주려고 했다. 그러다 허둥지둥 기술 가정 교과서 위에 마이쮸를 내려놓게 된 것이었다. 난 가만히 마이쮸를 쳐다봤다. 전학생은 그런 내 행동에 뒤따라 변명을 늘어놓았다.

“한국에서는 처음 본 친구한테··· 준다고 해서.”
“···아, 고마워. 잘 먹을게.”
“응!”
전학생의 활기찬 대답과 함께 종소리가 울렸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