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데 없어서 내가 쓰는 단편집

[단편/크미] 성장통













여기, 숫기 없는 한 청년이 있다. 

나이는 대략 19살, 이름은 없다. 


















아니, 뺏겼다.


























개호주만도 못 한 새끼들에게 
우리는 집도, 이름도, 나라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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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성장통




그 시작은 예고 따위 없었다. 한낮의 저잣거리는 여느 때처럼 분주했으며, 나물 바구니를 지고 나르는 아낙네들과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던 아이들, 고깃덩이 하나를 내다 놓고는 자기네 것이 가장 좋다 우기던 사내들. 모든 것이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날은 분명 평범한 날이 될 수 있었다. 

공습경보가 울린 건 신 시 경의 일이었다. 모두가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놀라 고개를 치켜든 순간, 몇몇은 번쩍이는 불빛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누군가는 팔다리 한 쪽을, 누군가는 자식을, 부모를, 또 누군가는 처자식을 먹여살릴 양식과 재산을 잃었다.

한순간이었지만, 요 근래 가장 참혹했던 그날. 우리는 아직도 그날에 머물러 있었다.




테러 이후 몇 번의 계절이 지나고, 셀 수 없을 만큼의 깊은 밤이 흘러갔다. 공포에 질린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공습 하나로 끝났으면 다행이지. 순사들이 슬금슬금 도시 전역을 점령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탓에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막연히 바깥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웃 댁 아저씨들이 처자식 굶어죽는 꼴을 볼 수 없다며 나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지가 몇 달이니, 마을에서는 더욱 불안에 떨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12살이었던 난 사건의 전말도 모른 채 어머니를 따라 집 안에만 머물렀고, 다행히 겨우내 먹을 식량을 비축해 두었기에 우린 나름 평탄한 겨울을 보냈다. 

하지만 생존은 생존이고, 나는 그에 반해 여전히 궁금한 것이 많았다. 이를테면 아버지가 평소 추구해오시던 바른 생활을 버리셨다는 것인데, 매번 밤중에 나가시어 아침이 되기 전 숨을 헐떡이며 세차게 대문을 걸어 잠그고는, 또 서재에 틀어박혀 아침도 거르시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드셨다. 그게 뭔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방문 틈 너머로 내다본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껏 자라오며 봤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진지하고, 또 심각했다. 나는 그게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바깥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만 겨우 유추했을 뿐, 10대 초반의 아이가 받아들이기엔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의문이 깊어만 가던 중 다음 해 봄, 아버지가 순사들에게 끌려가며 나의 인생도 180도 뒤바뀌었다. 




"빨리 따라와!!!"


"여보!!!"




집 안으로 들이닥친 순사들은 순식간에 아버지를 오랏줄로 꽁꽁 묶어버렸다. 허리춤에 찬 칼을 휘두르며 우리를 위협하고, 알 수 없는 말을 난발하며 아버지를 또 때렸다. 어머니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던 내 입을 막으시고서는 통탄스레 우셨다. 

끌려가듯 집 밖을 나서시던 아버지의 눈빛, 어머니와 나를 바라보시던 그 우직한 눈에 평생 동안 본 적 없던 눈물 한 방울이 톡- 떨어졌다. 입모양으로 "미안하다"를 수도 없이 되니 시며 결국엔 닫히고야 만 대문 밖으로 발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날 이후, 난 다시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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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약 7년 후, 경성.





"사쿠(사쿠)!!"
"거기서 뭐 해!!!"


"아, てつや(테츠야). 잠시 쉬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 조금 있으면 순찰 시간인 거 몰라?"
"얼른 들어가야 형무소에 끌려가지 않는다고."



어렵게 입학한 학교에서 만난 친구, 테츠야. 나와는 다르게 서글서글한 성격에 잘도 웃는 모습이 정이 가는 친구다. 사쿠라고 불리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통금 시간에 늘 밖을 배회하는 버릇을 고쳐놓기에 아달이 난 듯하다.



"형무소... 그곳은 어떤 곳일까?"


"거기 들어간 사람은 살아돌아올 수 없다고 했어."
"손톱을 뽑고 발가락을 자르고, 온갖 고문을 시킨댔어."
"그러다 죽으면 비참하게 버려지는 거야."


"... 비참하게, 버려진다라..."




아버지가 끌려가신 그날 이후, 어머니는 나를 더욱 근엄하게 키우셨다. 그리고 곧 모든 것을 알려주셨다. 아버지가 매일 밤에 나가셨다 새벽에 들어오실 수밖에 없던 이유, 그토록 서재를 비밀리에 감춰둘 수밖에 없던 이유를.

비가 추적추적 내려 낮인데도 사방이 어둑하던 어느 여름 날, 나의 눈을 가리고 잽싸게 서재로 들어가신 어머니는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 석진아, 너는 네 아버지가 자랑스럽니?"


"네. 당연하죠."


"... 아버지가 기뻐하시겠구나."















"사실 네 아버지는 ----- 란다."


"... 네?"


"부디 네가 아버지의 긍지를 물려받아
장차 가슴이 들끓는 그런 일을 했으면 좋겠구나."

"어머니 말, 알겠니?"


"......"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금이야 그리 놀랍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비밀을 처음 들었던 그 당시에는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그때만 해도 그 일과는 별개로 바깥 상황도 난 몰랐었으니까. 아무렴, 고작해봐야 13살 아이가 독립운동가에 대해 뭘 알았겠는가.

그때였다면 자식인 나에게까지 숨겨가며 몰래 독립운동을 했던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겠지만, 지금은 그 이면의 뜻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안다. 아마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면 가족인 나와 어머니까지 보복을 당할까 봐, 그것이 염려스러우셨던 것이겠지. 어찌 된 일인지 아버지가 잡혀간 이후 순사들은 또다시 우리의 집에 찾아오지는 않았으나, 눈을 감는 것이 두려워 매일 뜬 눈으로 밤을 샜던 그
당시의 기억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더 아프고, 두려우셨겠지. 




"... 하아..."


"뭐야, 너 울어?"


"아냐, 울긴. 바람 때문에 먼지가 들어갔을 뿐이야."
"내일 봐, てつや(테츠야)."


"그래, 지각이나 하지 말고!"



테츠야를 돌려보낸 후, 다 허물어져 가는 외관의 문을 드르륵-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풍겨왔다. 나무가 다 헤져 조심스레 발을 디뎌도 삐걱삐걱 소리가 나는 마룻바닥을 지나, 건물 안 쪽의 작은 방 문고리로 손을 옮겼다.



"さく(사쿠), 방금 들어온 거니?"



막 문을 열려는 찰나 마주친 주인 아주머니. 이 집에 살면서 계속 왕래해왔기에 친한 사이지만, 사쿠라는 이름은 익숙한 목소리로부터 들어도 언제나 낯설기 짝이 없다. 



"친구랑 잠시 만나고 왔어요."
"그나저나 아주머니, 저랑 단둘이 있을 땐 
그 이름 안 부르기로 했잖아요."


"에구머니나, 미안하다."
"나는 혹시라도 순사들이 들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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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제 진짜 이름도 아닌걸요."
"김석진이란 이름이 더 편해요."


"그래그래. 앞으로는 조심하마."
"그나저나 일은 잘 진행되고 있니?"


"아마 일주일내로 계획이 잡힐거예요."
"그땐 아주머니께 가장 먼저 알려드릴게요."



걱정 반 믿음 반의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는 말 없이 내 등을 토닥여주셨다. 나도 그런 아주머니의 손길을 마다하지 않았고, 피곤하겠다며 방으로 날 떠밀어주신 뒤에나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푸하- 한숨을 내쉬며 작은 등불을 톡- 하고 켜자, 낡은 방의 모습과 함께 벽에 나타난 것은 덕지덕지 묻은 빨간색, 파란색 물감. 누가 보면 이게 무슨 낙서인가 싶을테지만, 절대 아무 의미없는 채색질은 아니었다.

나무판에 그려진 원형 틀과 사방으로 갈라진 네 갈래의 줄기, 그리고 중심을 관통하는 곡선 하나가 그 위를 수놓고 있었다.

누군가가 창문에서 던진듯한 구겨진 쪽지도 함께 말이다.





















"날짜가 잡혔습니다."
"3일 뒤 13일, 중앙형무소에서 보죠."

















"...후우..."



쪽지를 읽자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모든 일의 시작점이자 의의가 될 이 결사가, 단 3일 뒤에 막을 올린다고 생각하니 꽉 잡은 두 손이 아려왔다. 그와 이 나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모든 이들의 염원이 울려퍼지게 될 그날, 미래를 기리기라도 하는건지 오늘의 달빛은 유난히도 밝았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빛을 등불 삼아 펜을 집어든 손, 미묘히 떨리는 두 손에 눌러담은 감정이 종이를 타고 꾹꾹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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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의 움직임이 멈춰지고, 땀에 흠뻑 젖은 손이 종이 위에서 떨어졌다. 긴 글을 쓴 것도 아닌데 마치 수필 하나를 완성한 것처럼 저릿저릿했다. 

조금씩 두근대는 심장이, 박동을 따라가지 못 하는 몸을 헐떡대게 만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될 순간이 머지 않았기에. 벽에 붙어있던 종이 하나를 부욱- 떼어낸 나는 비로소 미소 지었다. 빨강, 파랑, 검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작은 문양 하나. 화려하지 않지만 강단있는 색채가 눈과 마음에 가득 담겼다. 














그 순간 바라본 태극기는, 그 어느 것보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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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동안은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노발대발 하실 게 뻔했지만, 거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에게 그깟 꾸중이 무슨 소용이랴. 당장 모레의 생사마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일행들과 꾸준한 만남을 가졌다. 오직 13일을 위해 함께 달려와준 고마운 이들, 그 중엔 테츠야도 있었다.

테츠야는 보면 볼수록 신비한 아이인데, 조선임이 틀림없으면서도 자기의 본명을 나에게 알려준 적이 없다. 

거사를 치르기 하루 전날 밤, 테츠야와 나는 형무소 근처의 여관에서 함께 묵게 되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들며 장난도 칠 법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진 않았다. 아마 테츠야도 나도, 가볍지만은 않은 사명감 때문이었으리라. 

묘하디 어색한 침묵이 길어져만 갈 때, 나는 입을 떼었다.


"테츠야."


"응? さく(사쿠 ), 무슨 일이야?"


"이번 일이 잘 풀리면... 네 이름을 알려줄 수 있어?"


"... 뭐야ㅋㅋ 갑자기?"


"... 고마워서, 그래."
"시간이 흘러도 てつや(테츠야)가 아닌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어."


"......"



테츠야는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 아마 내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질문이라 그런거겠지만, 그의 대답을 듣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좋아. 알려줄게."
"... 알려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 불안하게 왜 그래."


"그치만, 사실인 걸."
"우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운명이잖아."


"......"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 테츠야의 말은 거의 다 맞았다. 식민시대에 사는 식민지인들의 신분에 불과한 우리. 얼마나 얄궂기 짝이 없는 운명인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은 더욱 오질 않고, 우리는 눈을 멀뚱멀뚱 뜬 채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기에 이르렀다. 결국 잠을 거의 자지 못 한 채로 새벽이 밝아올 때쯤, 테츠야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석진아, 지금 우리는 무한한 어둠 속인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이야?"


"주변은 어둡지,
빛이 밝아볼 기미는 보일 듯, 안 보일 듯..."
"조국을 잃어버린 게 이토록 힘든 일일 줄은 몰랐어."


"......"


"그런데... 그런데 말야."

"새벽 속에서 빛이 밝아오는 건... 
우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야."

"어둠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빛을 만드는 사람들."



테츠야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살짝 울먹이는 목소리를 삼키며 끝까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꼭 아침을 데려오자."
"그리고 가장 밝고 긴 낮이 되도록, 세상을 비춰보자."

"... 그렇게 해 줄거지?"















나의 대답은, 침묵을 가장한 굳은 악수로 대신되었다. 

꽉 잡은 두 손. 서로의 열기가 느껴지는 맞잡은 손에서 우리의 의지와 같은 붉은 태양이 피어오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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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거리는 평소와 다를게 없었다. 

순사들은 거리를 배회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눈치를 보며 어설픈 일본말로 우물거릴 뿐. 

딱 하나 다른 점이라면, 단지 중앙형무소의 뒷편에 선 낯선 인물이라고나 할까?



"......"


"......"



형무소의 뒷편에 위치한 테츠야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손을 휘휘 저어 신호를 보냈다. 무전기 하나 없는 빈약한 환경이었지만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나, 둘, 셋에 뛰쳐나가.'

'하나, 둘...' 



카운트가 시작되고, 테츠야의 손가락 3개가 펴진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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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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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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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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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수많은 관중들이 뛰쳐나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 넓던 공간이 순식간에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의 인파로 채워졌고, 또 한 번의 울림이 이번에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뜨겁게 달굴 만큼 파고들었다. 

모두의 입에서 나온 단 한 마디.



"대한 독립 만세"



우리는 이것 하나를 위해, 당연시 여겨져야 할 이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피로 물든 기억 속에서 버텨왔던가. 


예상 했다시피 순사들은 무자비로 공격을 퍼부었지만, 물러서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조국의 앞날과 영광을, 우리의 후손과 미래를, 부끄럽지 않은 조선인 한 사람으로써 숭고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웠다. 






주변의 몇몇 사람들이 쓰러져갔다. 순사들이 제멋대로 발포한 총 때문이었다. 사방팔방으로 피가 튀기고 겁에 질린 이들이 대열을 이탈하며 진영이 붕괴되었지만, 그마저도 잠시일 뿐이었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계속해서 외쳤다. 나 또한 맨 앞에서 그들을 선도하며 나아갔다. 

그러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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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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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흡... 흑..."













... 아...


의식이 흐려졌다. 

입에서 울컥 뿜어져 나오는 피를 본 순간,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상상치 못한 통증이 기분 나쁘게도 한기와 함께 복부를 쑤셔댔다. 막으려도 해도 피가 계속 흘러나와 어느새 내 옷은 붉게 물들었다. 와중에도 사람들이 이동하는 탓에 여기저기를 밟히고 나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죽는구나.'




그래도 이정도면,




'떳떳한 인생이었다.'

















"하아..."



눈이 감기고, 마지막 한숨을 내뱉었다. 

통증마저 점점 멀어져가고, 머릿속이 백지화 되었다. 

정말, 끝이구나...























"야 !!!!"
















"...테츠야..."


"일어나!! 일어나라고!!!!"



어디선가 달려온 테츠야는 인파를 뚫고 나를 일으켜 피시했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나의 피로 자신의 옷이 더러워져도 아랑곳 않은 채, 우리는 근처의 골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흐윽.... 안돼..."
"안돼 제발...!!! 일어나 김석진!!!"



"하아... 테츠야..."


"말하지 마, 제발 아무것도 하지마..."



테츠야의 눈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말 한마디 내뱉기조차 힘들었지만 그 눈물을 도저히 외면하지 못 하겠기에, 억지로 기력을 써가며 대답했더니 상처가 더욱 곪아갔다. 

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 테츠야, 고마워."


"...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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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이야. 내 이름..."

"......"



























고마워, 태형아.





























































































그로부터 약 5년 후,







푸르른 잡초가 잔뜩 자라난 어느 한 사람의 무덤, 그 앞으로 사박- 사박- 소리를 내며 누군가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무덤 앞에 작은 꽃을 내려놓더니, 두 번 절을 하고선 혼자만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아, 맞다. 혼자가 아니지.




"... 결국 우리는 지금 모든 게 끝났어."

"한글로 대화를 하고, 통금시간도 없어."
"강제징용도 그 무엇도 이젠 사라졌지."

"네가 이 모습을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누군가는 계속해서 말했다. 마치 대화를 하는 듯한 어조로.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의 대화 상대가 바로 여기 잠들어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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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싶다. 석진아."


눈물을 머금고 자리에서 일어선 태형. 회상의 눈빛으로 석진의 무덤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뒤를 돌더니, 나지막이 마지막 말을 읊조렸다. 


















"우리에게 밝고 긴 낮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