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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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를 치른 뒤의 아침은 뜻밖에도 조용했다. 시종들이 내는 발소리는 마루를 타고 은은히 번졌고 담장 너머로 들려오는 매화 가지 흔드는 바람 소리도 단정했다. 나는 작은 다기에 물을 따라 마셨다. 손에 닿는 찻잔의 감촉이 어쩐지 낯설었다. 아니 낯익어서 멈칫한 건지도 모르겠다.

 

전생의 혼례 전날 나는 찻잔 하나를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앉아 있었다. 병색이 완연해진 얼굴로. 숨이 곧 끊길 듯한 가슴을 안고도 아무 말 없이 차를 마셨었다. 그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눈앞의 이 찻잔과 너무 닮아 있었기에.

 

 

"부인, 곧 상을 들이겠습니다."

 

 

시종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허리를 깊이 굽힌 뒤 물러났다. 물이 담긴 찻잔을 창문턱에 올려두며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어쩌면 죽음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전생의 그날, 몸이 급격히 식어갔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고 입술은 마르게 갈라졌다. 약기운인지 병세인지 알 수 없는 감각들 속에서 나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누구도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다. 약해 빠졌으니 병으로 갔다, 모두가 그렇게 넘겼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죽음이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가진 채 돌아왔고 같은 상황을 다시 마주했으니까.

 

혼례 다음 날의 상차림은 격식 있게 차려졌다. 유가에서 내려온 음식이 상 위에 줄지어 올랐고 시종들이 분주히 들고 나는 중에도 나는 말이 없었다. 오히려 아무도 말하지 않는 하민의 부재가 더 많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그는 이 아침, 올 생각이 없었다. 전생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새벽이 밝기 전 나를 마주한 채 방을 나간 하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참으로 정중하십니다. 도련님."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찻잔을 들었다. 첫날밤에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빌미로 나를 찾아왔지만 진심은 없었다. 궁금해하는 눈빛은 있었지만 정은 없었다. 그러나 전생과 지금이 다른 점은 분명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무시하지 못한다. 말의 끝을 흘리지도, 눈길을 피하지도 못한다. 낯섦은 불편함을 낳고 불편함은 의심을 만든다. 그리고 의심은 끝내 시선을 멈추게 한다.

 

 

 

-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작은 함 하나를 시종에게 내어달라 말했다. 전생에 혼례를 올린 직후 받았던 유가의 혼인 예물이었다. 당시엔 그저 덤처럼 넘겼지만 지금은 다르다. 작고 반듯한 나무 함. 뚜껑을 열자 단아한 자수가 놓인 손수건과 한 쌍의 비녀, 그리고 흑갈색 병 하나가 보였다. 나는 그 병을 꺼내 조용히 뚜껑을 열었다. 익숙한 냄새. 아주 희미하지만 전생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건, 약이 아니군."

 

 

입 안으로 퍼지는 맛이 알았다. 미묘하게 씁쓸하고 약재라기엔 너무 정제된 기운.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보약이 아니다. 몸을 더 무겁게 만들던 그 감각과 닮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병을 다시 닫고 시종을 불렀다.

 

 

"이 약은 내 방에서 거두어 다른 곳으로 옮기게."

 

 

그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고개만 숙인 채 물러갔다. 나는 다시 함을 덮고 잠시 고요히 앉아 있었다. 누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나는 스스로를 지키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번 생에서 내가 택한 첫 번째 예의였다.

 

 

 

 

-

 

 

 

하민은 오후가 되어서야 얼굴을 비추었다. 나는 마루에 앉아 천천히 바늘을 꿰고 있었다. 비단 위로 뻗어나가는 실 한 올 한 올이 마음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무늬를 완성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바늘을 들고 있고 싶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발걸음이 다가왔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발소리의 무게만으로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에.

 

 

"바느질이 즐거워 보입니다."

 

 

그는 늘 그러했듯 예의 바른 말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감탄을 담은 말. 나는 가만히 웃었다. 침묵은 때때로 말보다 많은 것을 보여준다.

 

 

"마음이 바쁘면 손끝이 바빠지는 법이지요."

 

 

말을 던지고 고개를 들었다. 유하민은 내 앞에 서 있었다. 오늘따라 얼굴이 더 단정해 보였다. 깔끔하게 상투를 튼 머리, 차분한 빛을 띠는 청색 도포 차림. 어깨에 내려앉은 햇살까지 그를 밝혔다.

 

 

"부인께선 요사이 말씀하시는 빛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나는 조용히 실을 끊었다. 손에 들린 천을 곱게 접어 무릎 위에 올리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도련님께서 예사롭지 않게 보려 하심에 그런 것은 아닐지요."

 

 

짧은 정적. 그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눈빛은 지금, 의심과 경계로 얼룩져 있었다. 전생엔 결코 받을 수 없던 눈빛이었다.

 

 

"아침을 함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일찍이 일정이 있어서."

 

 

그 이상의 말은 없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도련님의 예라면, 이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말이었다. 그저 담담한 내 심경 그대로였다. 전생의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이번엔 놓치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는 앉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마루 끝에 발을 멈춘 채 시선을 두었다. 우리 사이엔 햇살 한 줄기와 접힌 바느질 천 하나뿐. 가까운 듯 먼 거리였다.

 

 

"부인께선 이 혼인을 어떻게 여기십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눈썹을 조금 움직였다. 그리고 가볍게, 그러나 또렷하게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이 혼인을 형벌이라 하셨었지요. 저는... 그저 그 말이 참 무겁다고 느꼈을 뿐입니다."

 

 

그의 눈매가 아주 조금 흔들렸다. 말의 의도를 짚으려는 듯 나를 오래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혹시, 그 말이 지난 일이 되어 버리신 겁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짧은 숨을 들이켰다. 말보다 그 숨소리가 더 길게 들렸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이 이어진 후, 그는 낮게 입을 열었다.

 

 

"그저... 지금의 부인은 예전과 달라서. 그게 자꾸 걸립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조심스레, 그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솔직했다. 하지만 그 속엔 아직 거리감이 분명히 남아 있었다.

 

 

"걸린다 하심은 혹, 불편하다는 뜻입니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잠시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끝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불편하다고만 하기엔, 설명이 어렵습니다."

 

 

나는 바느질 천을 가볍게 접으며 말을 이었다.

 

 

"마음을 흐리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걸로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처럼 고요하지 않았고, 무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엔 여전히 경계와 망설임이 선명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루 끝으로 걸음을 옮기며 짧게 말했다.

 

 

"도련님께선 여전히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계시는 듯합니다. 허나, 기다리는 것또한 여인으로서의 덕목이겠지요."

 

 

하민은 아무런 대꾸 없이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만이, 그가 아직 나를 완전히 밀어내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도련님. 그 한마디에 얕게나마 움찔거리는 하민을 끝내 시선에 담지 않은 채 자리를 벗어났다.

 

미약한 울렁임에 입꼬리를 옅게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