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개 좋은 마음을 잘 전하지 못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혹은 좋아하는 상대에게는 그리도 망설이면서 미워하는 것들에는 모든 감정을 쏟아 주어서라도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그래도 아직 세상은 따뜻하고 아름답기에, 우리는 좋은 마음을 고이 담아 예쁜 말로 뒤덮어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는 ‘편지’라는 단어로 마음을 전한다. 가끔 그것들 사이에 나쁜 마음들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끝은 늘 찬란하니, 매일 같이 누군가의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그녀는 자신의 일에 아주 오래도록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그를 만나게 된 것에서도 그녀는 무지 자랑스러웠다. 그를 만난 것이 마치 우연 같으면서도 그들 자체가 만들어낸 하나의 필연이라서.

𝐴𝑛𝑑𝑎𝑛𝑡𝑒 𝐸𝑠𝑝𝑟𝑒𝑠𝑠𝑖𝑣𝑜 | ℂ𝔸𝕃𝕃𝕀𝕆ℙ𝔼
주,
누군가의 마음들을 담은 편지가 가득 들은 가방을 힘겹게 짊어매고 자전거 위에 올라탔다. 코끝을 맴도는 은행 열매 냄새가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하기야 거진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섬이니 주민들도 대부분 어르신들이셨다. 몇 달 전 육지와 이어지는 다리가 생긴 이후로는 관광객이 조금 는 편이었지만.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자전거로 오르다 보면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처럼 숨이 가빠 오기도 하는데, 그런 골목길 하나하나에 그려진 벽화들이 나를 위해 숨을 불어 넣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붓의 손길 하나하나가 내 삶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최근 들어 우리 동네로 이사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새로운 신축 빌라를 지어대더니, 젊은 부부 몇몇과 도시에 지친 청춘 여럿이 예쁘고 모던한 그 신축 빌라를 꽉꽉 채웠다. 그래서인지 육지에서부터 전해지는 부모들의 걱정, 지인들의 안부들이 편지로 자주 오기 시작하면서 동네의 하나뿐인 우체부인 나도 덩달아 발을 바삐 굴려야 했다. 땅끝마을 땅끝마을 하더니, 정작 찾아오기는 귀찮은지 그렇게 편지만 주구장창 보낸다. 이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사 온 후, 편지 때문에 자주 찾아갔던 집들도 점점 오는 편지가 줄었다. 요즘은 가방이 좀 가벼운 것 같기도 하고.
사랑이란 이리도 가엾고 쓸모없이 버려지는 존재인 건지, 아님 그들이 삶을 잘못 살아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시로부터 이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의 마음은 정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것도 사람이 아주 적고, 누군가가 찾아오기도 힘든 이런 땅끝으로 도망친 사람들은 더더욱.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따스하고 눈부셨다. 고작 도시 따위가 잠재울 온도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편지 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직업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인 '감사합니다'는 내가 행복을 추구할 용기를 준다. 편지를 전해주면 찾아오는 그 다섯 글자에 심장이 쿵쿵- 뛰고 두근두근- 하더니 종국엔 벌컥거리기까지 한다. 처음엔 그런 감정이 높은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올라 숨이 차서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난 그냥 그 말이 좋았던 거다.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오묘한 그 말이.
나의 세상은 너무나도 완벽하다. 이렇게나 행복한 곳에서 어르신들과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고, 매일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들으며, 좋아하는 풍경과 해 질 녘을 바닷바람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느낄 수 있으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머릿결을 스치는 다소 습한 공기가 코끝을 감쌌다. 행복했다.
***
윤,
도망쳤다.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난 그녀로부터 도망친 걸까, 황폐하고 차가운 도시로부터 도망친 걸까. 아무튼 난 얼떨결에 땅끝마을에 방 하나를 계약해버렸다. 꼼짝없이 2-3년을 이런 곳에서 살게 된다는 자각이 끝나자마자 내 선택을 후회했다. 회피할 바에야 그곳에 남아있는 게 더 나았을까. 부딪힐 것 같으면 더 세게 밟으라 더니, 여전히 난 5년 전과 같이 내 마음을 음악으로만 증명하기 바빴다. 정작 내가 이렇게 사는데도.
그래도 너와 멀어지고 도시에서도 멀어지니 곡이 더 잘 써졌다. 약간 스스로 세뇌한 것도 있긴 있었지만 실상 골치 아픈 문제 여럿이 한꺼번에 사라지니 해야 할 일이 떠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곡은 이쯤 됐으니 가사를 써볼까 싶어 예전에 써뒀던 곡을 틀었던 때였다. 엉성한 가이드 속에 살짝 섞인 웃음소리, 지금은 아무리 방에 틀어박혀도 나오지 않을 사랑스러운 멜로디. 알 수 없는 감정에 휘말리고 있는 나에게 살짝 열어둔 창에서 바람이 살짝 불었다. 습한 공기가 코끝에 와닿았다.
음 하나하나에 애정을 모두 실은 듯, 직선 없이 곡선만 가득한 곡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이 곡을 쓰던 당시엔 네가 내 옆에 있었고, 너와 사랑을 나누며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던 때니까. 이래서 사람들이 사랑이란 걸 하는 걸까. 나도 분명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혼자 방 안에 앉아있는 건지. 괜히 네가 생각나 페트병 뚜껑을 만지작거렸다.
너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다가도 갑자기 네가 내 머릿속에 들어오기라도 하면, 심장이 멈춘다. 가슴께가 미친 듯이 아려오고 머리는 얼음을 잔뜩 물은 것처럼 띵했다. 눈가는 매일 밤마다 우는 바람에 짓물려서 제대로 눈을 뜰 수 있는 날이 얼마 없었다. 사실 이곳에 온 뒤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너를 다시 떠올리는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너는 날 그리워할까. 나처럼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너와 관련된 모든 걸 볼 때마다 머릿속을 누가 억지로 지우는 듯한 기분이 들까. 아마 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버린 사람은 기억 못 하겠지만 버려진 사람은 죽을 만큼 괴롭다. 사랑이란 이리도 가엽고 쓸모없이 버려지는 존재인가. 나의 순애는 대체 어디로 향하는가. 나는 네가 없는 나의 세상에서 대체 무슨 이유로 삶을 살아야 하는가.
“편지 왔습니다!”

“······“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오는 이 편지를 난 과연 받아도 되는 것인가. 머릿속에 가득 찬 나의 죄책과 원망을 가득 들어안은 채 짓무른 눈가를 이고 문 앞에 다가섰다. 한참을 허공에서 망설이던 손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그리하여 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아주 작고 하얀 주제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씩씩하고 행복한 표정으로 서있는 그녀를.
“편지요! 김유경 씨로부터 왔네요.”
“······.”
“그··· 편지 좀 받아주시겠어요···?“
”네.“
가느다란 손가락에서 부드럽게 뺏어든 편지가 제법 곱게 접혀있었다. 사실은 그녀의 겉모습을 보자마자 네가 너무 생각났다. 닮은 점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그냥 네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입에서 편지의 발신자를 듣는 순간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아무 생각을 하지 못한 게 아니라 아무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온통 머릿속이 너로 가득 차버려서.
그래서 난생처음으로 얼굴 붉힐 일을 했다. 항상 이성적이던 내가 겨우 너 하나 때문에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래서인지 당황한 듯 보이는 우체부가 나를 갑자기 꼭 껴안았다. 평소 같았으면 밀치고도 남았을 내가 그녀를 품 안에 갇혀 가만히 서있었던 건 그녀가 너를 닮았기 때문이었을까, 삶에 지쳐 누군가로부터 안기고 싶었기 때문일까. 결국 모든 건 네가 원인이었다. 이젠 정말 너로부터 멀어지고 싶다. 이런 편지조차도 다시 반송하고 싶을 만큼.
***
주,
오늘도 무사히 할 일을 끝냈다. 늘 그랬듯 큰 가방 안에 덩그러니 남겨진 하나의 편지를 고이 모셔 소중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전할 터였다. 오늘의 마지막 편지라서 그런지 해가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페달을 살살 돌리며 작은 난간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는 햇살을 마주했다. 아, 행복해. 이런 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쩜 이리 따스하고도 완벽한 하루인지, 기분이 마구 좋아져 자전거에서 내리고도 가방끈을 꼭 쥐었다.
마지막 편지는 손에 쥐자마자 느껴졌다. 좋은 내용은 아니겠구나. 예쁜 편지지도 아니고 봉투에 적힌 글씨체도 그다지 둥글지 않았다. 마치 용건이란 딱 하나뿐인 정갈한 글씨체에 직감적으로 편지를 전해 받은 사람이 이 편지를 받자마자 인상을 찌푸릴 것 같았다. 그래도 그런 마음을 전하는 것 또한 나의 일이니 책임감을 가지고 낮은 계단을 올랐다.
“편지 왔습니다!”
짧고 간결하게 현관문을 똑똑 두드린 나는 문고리를 살짝 만졌다. 우체부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문고리의 온도만으로도 그 사람을 짐작할 수 있다. 집 안이 따끈하고 정겨운 사람들의 집은 대부분 문고리가 미지근했다. 다만 이 집처럼 문고리를 잡자마자 설원 위에 서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문고리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 너무 많은 상처를 받고 이곳으로 도망쳐 온 사람들일 테니까. 내 예감과 다르지 않게 문을 열자마자 보인 그 역시,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그래서 난 더욱 밝게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편지요! 김유경 씨로부터 왔네요.”

“······.”
“그··· 편지 좀 받아주시겠어요···?”
“네.”
뭐랄까, 그는 내가 지금까지 봐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무언가에 죽을 듯이 열광하지도, 삶을 포기한 듯한 표정도 아니었다. 그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의 눈동자를 제외한 모든 것이. 편지가 왔다는 말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문을 열어 놓고서는 발신자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러고는 아주 조심스레 편지를 받아들더니 이내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눈물을 떨궜다.
이렇게 깊은 우울을 가진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럼에도 편지를 받아달라는 나의 말에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 앞에서 우는 그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실은 잘은 모르겠다. 내가 왜 그를 껴안았는지는. 애초에 초면인 것과 더불어 문고리가 차가운 사람이었다. 문고리가 차갑다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외롭고 지친 사람들이라 이렇게 정을 주었다가는 그들이 다시 떠나갈 때가 된다면 나야말로 문고리가 차가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의 처연한 얼굴이나 창백한 손끝 하나하나가 예쁘지도 않았음에도 그를 꽉 껴안았다. 한참이나 큰 사람을 안으려니 조금 힘이 들긴 했지만 그가 우는 모습은 보기 싫었다. 그 또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가 눈물이 멈출 즈음이 되어서야 주머니에 혹시 몰라 접어두었던 손수건을 그의 손에 쥐여주고 재빠르게 빌라를 벗어났다. 그가 창피해 할 것 같기도 했고, 날 성추행범으로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불안감.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부끄러워서 그랬다. 처음 보는 남자를 이렇게나 꽉 껴안은 나 스스로가 너무 발랑까진 것 같아서. 천천히 페달을 밟으며 도착한 빌라를 누구보다 빠르게 페달을 굴러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살짝 덧붙여 말하자면···.
“미쳤어 진짜···.“
그는 내 이상형에 아주 걸맞은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
윤,
감긴 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자연스레 잠에서 깼다. 매일 아침처럼 오늘도 여전히 내 눈가는 제대로 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오후 무렵에 우체부에게 안겨 운 이후로 나 스스로에게 너무나도 경멸감을 느껴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조카뻘한테 수치를 보였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어제와 오늘 하루는 망했고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앞으로의 날들이 망한 이유가 그뿐만은 아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탁자가 놓인 곳까지 느리게 걸어갔다. 어제 너로부터 온 편지가 이혼 증명서 일 줄은 정말 예상치도 못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나한테 잘해보자는 내용 따위를 편지로 보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다. 그냥 이런 서류만 보낼 줄은 몰랐다는 거다. 지금까지 서로를 본 세월만 10년이 넘는데 정도 없이. 지금은 덤덤하게 말할 수 있지만 어제 편지를 뜯자마자 나온 이혼 증명서에 온몸이 무너져내렸다.
내가 이러려고 너랑 결혼을 했나. 울분 가득한 혼잣말과 멈추지 않는 원망이 내 모든 마음을 증명했다. 탁자 밑에 쭈그려 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래, 넌 나를 버렸다. 아주 잘도 버렸다. 난 아직도 너에게 매달리고 있는데도 넌 나와 함께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너와 내가 연애하기 직전까지도 난 너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영원을 기약한 사이였으면서도 너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더 옥죄게 했다. 어젯밤은 그렇게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침대에서 일어나자마자 한 일이 이 서류를 보는 것이라는 게 너무나도 비참했다.

“지랄 났네···.”
하필이면 탁자가 유리인 탓에 엉망인 내 모습이 비쳤다. 이 탁자도 네가 신혼집 가구 준비할 때 가장 좋아했던 가구였는데.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우리의 신혼집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우리 집을 떠난 이후로 너와 나의 모든 흔적을 들고 내가 이곳으로 내려왔으니까. 그래서인지 아직도 이 탁자를 보면 네가 내 옆에 있는 것 같았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예쁜 웃음을 지어 보일 것 같고, 탁자에 앉아 내가 만든 볶음밥을 남김없이 먹을 것 같았다.
탁자 위에 놓인 새하얀 손수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이젠 너와의 추억에서는 빠져나와 현실을 즉시 해야 했다. 대체 이 손수건을 어떻게 그 우체부에게 전해줄지도 걱정이었다. 우체부를 찾아가기도 뭐 하고, 아니지 찾아가야 하나. 복잡해지는 머리에 의자를 끌어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찾아가서 전달해야겠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울더니 이젠 이사 이래로 첫 외출이라니. 대체 그 사람은 뭐길래 나를 이렇게도 바꿔놓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바삐 움직이는 내가 새삼스러웠다. 이곳으로 내려온 사이에 살이 많이 빠졌는지 평소 같았으면 잘 맞았을 셔츠가 조금 크게 느껴졌다. 차가운 문고리를 돌려 당기자 바깥바람이 방 안으로 빠르게 몰아쳤다.
“아, 이제서야 좀 사는 것 같네.”
창문이 아닌 온몸으로 바람을 느끼니 내가 살아있다는 게 와닿았다. 앞으로는 산책도 하고, 경치도 구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도 모를 우체부에게 고마웠다. 조금씩 발걸음을 내디뎌 바닷가 산책길을 걸었다. 이렇게 예쁜 세상인데 왜 모르고 살았을까. 머리카락을 헤집는 바람이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간만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내뱉고 싶었다. 행복하다. 행복할 것이다, 이제는.
***
주,
그에게 편지를 전해준 뒤로 집에 빠르게 도착한 나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대체 왜 그랬지, 왜 갑자기 그 남자를 껴안았지, 근데 그 사람은 왜 이렇게 내 취향인 거지, 왜, 왜, 왜? 머릿속을 꽉 채우는 수만 가지 질문에 골이 아파 고개를 푹 숙였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촌구석에서 자라 남자는커녕 매일 보는 말괄량이들이랑만 친하게 지내서 그런 것일까. 아무튼 정말 신경 쓰인단 말이야···. 그렇게 깊은 심연을 가진 사람은 정말 처음이었다고. 입술을 꽉 문 채로 무릎을 매만졌다.
“너 중얼거리는 거 다 들리거든? 그렇게 신경 쓰이면 내일도 보러 가던가.”
“아씨, 너 자꾸 말없이 이렇게 내 집 불쑥불쑥 찾아올 거야?”
“말해도 안 들으면서. 전화한다고 전파가 잘 터지는 곳도 아니잖아, 여기.”
“그래도 말은 좀 하고 다니라고.”
“그 남자 잘생겼어?”
“넌 진짜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잘생겼냐구우. 뻔뻔스레 물어오는 내 얼마 없는 친구 연수는 어릴 때부터 나를 딸처럼 대했다. 즉, 엄마처럼 굴었다는 뜻이다. 연수에게 대들어봤자 어차피 이기는 건 연수라는 걸 알기에 나의 모든 것을 연수에게 털어놓는 편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에 대해 연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무지무지 내 취향이라는 것도.
“난 찬성이야. 네가 자전거랑 결혼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남자라니 다행이지.“
”죽을래? 그리고 그 사람이랑은 절대 연애 못 해.”
“왜?”
“누군가를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처음 본 남자랑 무슨 연애는 연애야, 계속 이런 질문할 거면 집에나 가.“
한다면 하는 거지 그게 무슨 생뚱맞은 핑계야. 하고 싶은 거 맨날 하고 사는 애가 무슨 내숭을 떨어, 그냥 원래대로 해. 취향 찾기가 얼마나 힘든데. 연수는 그렇게 한참을 내 옆에서 잔소리했지만 정작 내 귀로 타고 들어오는 말은 없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내일 그와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냥 내일은 울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런 것뿐이다. 정말 그것뿐이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어 우체국으로 출근을 하던 참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 해안 도로를 따라 느슨한 하루를 보내던 중이었는데 우체국 앞에 누군가가 덩그러니 서있었다. 우체국 앞에 주차된 두 대의 차와 멀대처럼 서있는 한 남자.

바닷가의 거세고도 부드러운 바람에 머릿결이 잔뜩 휘날리고 있는 허름한 셔츠의 주인공. 뒷모습만 봤음에도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는 십상이었다. 그의 왼손에 들려진 하얀 손수건이 제 것임을 눈치챘으니까.
”저기요!“
”아, 오셨네요.“
“추우실 텐데 안에서 기다리시지···. 들어가실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괜히 추태를 부려 곤란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세상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네!”
“여기 손수건이요.“
”아니 무슨 그 사이에 빨래까지···.“
그가 선택하는 단어들은 무언가 달랐다. 조금 더 성숙하고 얌전했다. 그에 비해 난 여전히 어리숙한 말투였다. 어른답게 빌려준 손수건을 빨아서 돌려주는 것 자체부터 난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수건에서 답지 않은 향긋한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그나저나 어제 볼 때는 몰랐는데 오늘 보니 평소에는 꽤나 무던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치 표정을 잃은 사람처럼.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감미로워서 귓가에 가득하게 느껴졌다. 또다시 행복이라는 단어를 실감하게 할 만큼. 대화는 이어나가고 싶은데 할 말은 없고, 이대로 헤어지기에는 아쉬운데 이대로 붙잡고 있는 것도 상황이 이상해 고민이었다. 그래서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 솔직히 그 질문 자체가 너무 창피했다.
“어제 온 편지 내용은 어떠셨어요? 대부분 문고리가··· 아니 아무튼 그런 차분한 봉투에서는 애매모호한 내용들이 많이 오니까···. 아니에요, 실례를 범했네요.”
“이혼 증명서요.”
“아··· 이혼···.”
“드디어 제가 걔로부터 정식적으로 버려진 거죠. 버려진다는 말보다는 유기했다고 해야 하려나.“
“유기라니요.”
“원래 사랑이란 게 그렇잖아요. 가엾고도 버려지는 존재. 그냥 사랑과 저를 한 번에 유기한 거예요.”
“그렇다 해도 자신을 너무 내몰지는 마세요. 버려진다는 건 어쩌면 슬퍼 보일 수도 있지만 좋은 기회일 수도 있거든요.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멍한 표정으로 내 얼굴의 어느 한 부분을 보며 말했다. 눈을 바라보는 건 아닌데 눈을 바라보는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눈빛으로 우체국 앞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들과 우체국, 그리고 이웃들에 관한 이야기 등 전부 내가 이어나간 것 같긴 하지만 그가 너무 내 말에 경청하고 있었기에 대화를 멈출 수도 없었다. 멈추고 싶지도 않았고. 그러나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갑작스레 우체국 문이 열리며 나의 직속 선배이자 하나뿐인 직장 동료가 나에게 소리쳤다.
“야! 지금 9시 훌쩍 넘었어. 출근 시간 한참 지났다고.“
”아, 알았어!”
“저도 그럼 이만 가볼게요. 제가 지각하게 한 건 아닌가 싶네요.”
“아니요, 아닙니다! 대화 너무 즐거웠어요.”
다급하게 말하는 날 보며 그가 옅게 웃었다. 곱게 접어 올라가는 입꼬리와 예쁘게 휘어지는 눈꼬리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어제 그의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이 비쳤다. 그가 앞으로도 웃는 일들만 가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좀처럼 그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혹시 점심···!”
“······.”
“갔네···.”
좀처럼 아쉬움이 사그라들지 않는 끝맺음에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 그가 내 새끼손톱보다 작게 보일 즈음이 되어서야 우체국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아까의 좋은 분위기를 확 망친 직장 동료에게 한바탕 열불을 내고선 자리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왜인지 뒷모습마저도 외로워 보이는 그가 자꾸만 생각났다. 한참을 그 남자만 생각하던 와중에 동료가 말을 걸었다.
”아까 그 남자 누구야?“
”얘기하자면 길어요.”
“연애해? 표정 장난 아니던데, 너.”
“연애는 무슨 연애. 어제 하연수도 똑같은 말 했다가 저한테 발길질 당했거든요? 그런 말씀하실 거면 제 발차기 맞을 각오하시고 말씀하세요.”
“네 눈이 평소 보던 평범한 눈이 아니던데···. 너 그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누가 봐도 그런 눈이라니깐.“
내가 그 남자를 좋아한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난 그를 어제 처음 만났고, 심지어 그에게는 어제의 기억이 좋게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끝내자마자 바로 머릿속으로 찾아오는 그의 얼굴이 내 두 눈을 질끈 감게 했다. 나 진짜 그 남자 좋아하나. 사랑은 벼락이라고 하던가, 좋아한다는 자각을 하자마자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 거기에 멍한 표정까지 추가.
나 정말 그 남자를 좋아하나 봐. 어제 살펴본 편지 봉투에 적혀있던 ’민윤기’가 머릿속을 빙빙 떠돌았다. 민윤기, 민윤기, 민윤기. 무슨 이름도 이렇게 입에 착 붙는지 혼란스럽다 못해 심장이 마구 뛰었다.
쿵쿵거리다 두근거리더니 종국에는 덜컥-. 자전거를 탄 것도 아닌데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다. 사랑일까, 사랑인 걸까, 사랑인가 봐. 머릿속과 심장을 온통 민윤기라는 단어와 그의 얼굴로 가득 채우던 참이었을까, 우체국 문이 벌컥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는 그렇게 상상하던 그가 숨이 찬 듯한 행동으로 무릎을 살짝 구부린 채 숨을 크게 몰아쉬고 말을 걸었다.
”저기요.”
”네, 무슨 일이신··· 어?”
“혹시 오늘 점심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요? 저, 아니 전 당연히, 네네 당연히 괜찮죠.“

“그··· 밥 한 끼 같이 하시죠.”
“네, 좋아요, 좋아요! 어디서 보실까요!”
엄마, 딸 첫사랑 성공한 것 같아.
***
윤,
지금 난 우체국 앞에 얼척없이 서있다. 들어가서 손수건만 주기에도 뭐 하고, 애초에 그녀가 우체국에 있을지 없을지도 잘 모르겠다. 팔랑이는 셔츠 끝자락이 마치 나를 우체국으로 이끌기라도 하는 듯 바람과 합세해 날 우체국으로 들이미는 것 같았다. 없더라도 그냥 안에 계신 분한테 전해드리고 올까. 그래도 예의가 있지, 손수건까지 주고 추태까지 부렸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을 때쯤 뒤에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아, 오셨네요.“
“추우실 텐데 안에서 기다리시지···. 들어가실래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괜히 추태를 부려 곤란하게 해드린 것 같아서요.”
“아닙니다! 세상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네!”
“여기 손수건이요.“
”아니 무슨 그 사이에 빨래까지···.“
말 하나하나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부터 쉴 틈 없이 쫑알거리는 입술이 참새를 연상시켰다. 키도 작고 입술도 볼록 튀어나와 있고, 참새가 생각난 순간부터 그녀의 모든 행동들이 참새처럼 보였다. 그 뒤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전부 귀여워 보였다. 유경이는 성숙하다 못해 말투나 표정에서도 고고함을 놓치지 않았었는데, 그런 사람을 보다 갑자기 이런 작고 조잘대는 사람을 보니 귀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 온 편지 내용은 어떠셨어요? 대부분 문고리가··· 아니 아무튼 그런 차분한 봉투에서는 애매모호한 내용들이 많이 오니까···. 아니에요, 실례를 범했네요.”
다만 이 질문은 그다지 귀여운 질문은 아니었다. 여러모로 내 상처를 많이 찌르는 말이기도 했고. 본인도 말을 내뱉고는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어버버거리며 말 끝을 흐렸다. 가슴이 아려오는 와중에도 당신이 귀엽다고 느낀다면 이건 부성애일까, 사랑인 걸까. 아무래도 부성애겠지. 저 여자는 누가 봐도 어리고, 가타부타 난 이혼 직전까지 온 삼촌뻘이잖아. 이상하게도 그 생각을 하자마자 이 여자를 귀여워하는 것에 거리낌을 느끼지 않았다. 그냥 삼촌이 조카 좋아하는 정도지 뭐, 싶은 마음이었던 걸까. 그래서 질문에도 흔쾌히 답을 했던 것 같다. 대답하면서도 이혼 증명서라는 존재가 내 앞으로 왔다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 코끝이 살짝 시렸지만.
“이혼 증명서요.”
“아··· 이혼···.”
“드디어 제가 걔로부터 정식적으로 버려진 거죠. 버려진다는 말보다는 유기했다고 해야 하려나.“
“유기라니요.”
“원래 사랑이란 게 그렇잖아요. 가엾고도 버려지는 존재. 그냥 사랑과 저를 한 번에 유기한 거예요.”
“그렇다 해도 자신을 너무 내몰지는 마세요. 버려진다는 건 어쩌면 슬퍼 보일 수도 있지만 좋은 기회일 수도 있거든요.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투는 뭔가 달랐다. 평범한 사람들의 말투라기엔 너무 따뜻했고, 그렇다고 독특한 사람이라기엔 보통의 사람처럼 이성과 감성이 공존하는 말투였다. ‘그 사람으로부터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아보는 것’이란 말이 왜 이리도 끌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또한 그녀가 말해서 더욱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카라니 삼촌이라니, 귀엽고 어리게만 보던 사람이 정작 나보다 현명하다는 생각에 더 대화해 보고 싶다는 마음이 거세게 들었다. 이런 걸 매력적이라고 하는 건가. 이혼 증명서 받은 사람 치고 웃음이 지어지는 걸 보니, 겨우 이 사람 하나 덕에 몇 시간 만에 숨이 트이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 뒤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눴다. 이사 이후 첫 외출이라 동네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탓에 궁금한 걸 물었더니 궁금하지 않았던 것까지 전부 설명해 주는 탓에 어떤 집에 어떤 이웃이 사는지까지 알게 되었다. 한동안 쫑알거리던 그녀가 우체국 문 사이에 선 남자와 소리를 지르며 대화했다. 지각이라는 단어를 얼핏 들어 왼쪽 손목에 둘러진 시계를 보니 9시 15분 정도였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렇게나 대화했다는 것에 신기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사 후 첫 외출이자 어제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처음으로 대화하는 것이었으니까.
“저도 그럼 이만 가볼게요. 제가 지각하게 한 건 아닌가 싶네요.”
“아니요, 아닙니다! 대화 너무 즐거웠어요.”
이젠 집에 들어가서 뭐 하지. 곡을 쓸까, 가사를 쓸까, 아니 애초에 이혼서류부터 작성해야 하나. 밥은 먹어야 할까, 근처 마트는 어디지. 복잡하고도 일정한 생활 패턴에 발걸음이 잦아들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일이면서 왜 오늘따라 처지고 외로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간만에 누군가와 대화를 해서 내가 외로웠다는 자각이라고 한 것일까. 그래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미친 행동도 전부 그녀 때문이라고, 그리고 난 지금 그녀에게 달려가고 있을 뿐이라고.
아까 전까지는 굳게 닫혀 열기 무서웠던 우체국 문을 벌컥 열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줄 단 하나뿐인 누군가에게 나를 제발 살려달라고, 제발 이 고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즉, 난 그녀와 점심을 먹고 싶었다. 그녀가 내 옆에서 계속 말을 꺼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네, 무슨 일이신··· 어?”
“혹시 오늘 점심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요? 저, 아니 전 당연히, 네네 당연히 괜찮죠.“

“그··· 밥 한 끼 같이 하시죠.”
“네, 좋아요, 좋아요! 어디서 보실까요!”
넌 날 잊은지 한참일 테니 나도 이제 널 잊을 준비를 해도 되겠지? 나도 이제 너 없이 웃는 방법을 알아. 이젠 내 세상에 네가 없어도 숨 쉴 방법도 알아. 그러니까 너와의 과거는 잠시 내 마음 한 켠에 남겨두고 새로운 삶, 너로부터 벗어난 나만의 삶을 살고 싶어.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네?”

“저 볶음밥 되게 잘하는데.”
너와는 완전히 다른 누군가와 아주 새로운 삶을.
+ 민윤기가 볶음밥 얘기한 이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