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우정

08. 경험의 무게

문을 부서져라 두드리는 소리에 연준은 무의식적으로 귀를 막았다. 벌써 삼 분째다. 이쯤되면 갈 법도 한데 문 너머 사람들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려댔다. 연준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열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광주 시민들이 서 있었다. 성가시게 됐네. 연준이 머리를 쓸어넘겼다.


“누구세요?”
“여, 여기 혹시 최수빈이라고 있어요?”


그 사람은 무슨 일로 찾느냐고 물으려던 찰나 뒤에서 수빈이 다가왔다. 그는 안심해도 된다면서 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에요?”
“계엄군이 쳐들어왔다는…소식 들었지라…?”


수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광주 사람들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렸다. 위험, 어쩌면 죽음 앞에서 인간은 이렇게 두려울 수 밖에 없었다. 수빈은 연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준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수빈은 그를 무시했다.


“…싸울겁니다. 그때처럼요.”


그러자 사람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긴장한 듯 했다. 그들은 모두 고맙다며 연신 인사를 하고 더러는 눈물을 흘렸다. 사람들은 보잘것없지만 광주를 위해 애써주는 보답이라며 먹을 것들을 내밀었다. 키 큰 정육점 주인이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내밀고 채소가게를 한다는 아랫집 아주머니가 대파며 배추며 채소들을 한아름 내밀었다. 수빈이 사양할라치면 그들은 손사래를 치면서 빙그레 웃기만 했다. 사람들은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유유히 걸어갔다. 문을 닫자 낯선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수빈은 제 뒤에 서 있던 연준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연준은 베란다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옆에서는 낡은 선풍기가 털털거리며 돌아갔다. 수빈은 그 옆에 앉았다. 잠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연준이 먼저 신경질적으로 선풍기를 껐다. 어딘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듯 했다. 수빈은 어리둥절한 채로 연준을 주시했다.


“미쳤어요?”
“네?”
“아직도 잘 모르겠냐고요.”


연준이 따져 물었다.


“위험해진다고요, 우리 둘 다.”
“…아…”


그래, 그걸 망각했다. 수빈은 혼자가 아니다. 또 다시 시위에 참여하게 되면 이번에는 정말 계엄군의 눈에 띄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동거인인 연준 또한 위험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수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기적으로 생각한 것이 부끄러웠다.


“죄송해요.”
“……”
“……짐 쌀게요.”


그러자 연준이 ‘이건 또 뭐야’ 하는 표정으로 수빈을 올려다보았다.


“뭐라고요?”
“투쟁을 멈출 순 없어요. 그치만 제가 싸운다면 그쪽이 위험해지잖아요. 여기는 나가고,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야!”


연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들고 있던 카세트테이프를 냅다 바닥에 던졌다. 수빈이 깜짝 놀라 쭈그려 앉아서 테이프를 집어들고 깨진 곳이 없나 살폈다. 머리 위에서 이상하게 씨근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빈은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연준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거렸다.


“누군 싸우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아요?”


나라고 이런 상황에서 일말의 죄책감도, 정의감도 없겠냐고요. 연준이 눈을 벅벅 닦고서 수빈을 올려다보았다.


“왜 다른 사람들 생각은 안 해요?”


죽으면, 슬퍼할 다른 사람들,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아직 감정의 여운이 남았는지 바들바들 떨리는 연준의 목소리에 수빈이 움칫거렸다.


“나라고 계엄군 편이겠어요? 나라고 면상에 철판 깔고 보고만 있겠냐고.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사람새끼면 어떻게 그거 보고 무덤덤하겠어요? 위선이라고 생각해도 되는데 씨발 다른 사람들 생각도 좀 하란 말이야…!”


문득 수빈은 아빠가 보고 싶어졌다. 서울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하고 있는 아빠. 그 꺼끌꺼끌한 수염과 어울리지 않는 샛노란 옷이 그리워졌다. 아들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를 하고 있는 것을 알면 어떻게 할까? 왜인지 절망스러워졌다. 계속해서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이 행동이 과연 선인지를. 아니면 선을 가장한 또다른 위선인지를.

그러나 그가 가야할 길은 너무나 명확했다. 수빈은 자신이 있었다. 위선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고, 기절한 와중 어렴풋이 총성을 들었으며, 탱크의 발포음을 들었다. 이미 모든 것을 경험한 이상, 싸워야만 했다. 광주에서의 경험의 무게를 기꺼이 질 준비가 수빈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