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도치's 사담방인데.. 이제 단편선을 곁들인

#[단편] 뉴욕 치즈 케이크


photo


- 사진찍는게 그렇게 좋습니까?



- 음.. 사실 그것보단, 그때 하는 말을 좋아해요. 



- 무슨..? 




- ....... 조명, 카메라, 액션,






촬영하다





.
.
.
  
photo

_ 뉴욕 치즈 케이크




































***



photo
 

낮은 뱃고동 소리가 허공에 퍼졌다. 
1926년, 뉴욕 항구에 도착한 메모리얼호에서는 바다를 건너 온 수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미국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1920년대, 최고의 경제 호황을 누리던 뉴욕. 
그곳은 그야말로 환희와 향락이 가득한 낭만의 도시였으니. 

그리고 빠르게 제 갈길을 찾아 가는 사람들 속, 우두커니 서있는
동양인 한 사람. 긴장과 흥미로 가득 찬 눈빛에서는 서양 세계에 대한 환상과 경계심이 한데 어우러져 반짝이고 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유독 인상깊은 이자의 이름은 김남준.

경성에서 이름난 호부(豪富) 김씨 가문의 차남인 그는 출세하겠다
거금을 들여 일어를 배우는 형을 등지고 홀로 학당에 나가 꼬부랑어라 일컫는 영어을 배웠고,
나이가 찼으니 배우자로는 참한 일본인 여성이 좋겠다는 부모님의 등쌀에 발을 빼며 도망치듯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다행히 늦게 배운 영어에 재능이 있었던 터라, 이러한 유학이 가능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그에게는 급하게 결정된 일이니만큼 얼결에 뉴욕에까지 닿게 된 것이였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는 그의 앞에 별안간 뛰어오기라도 한 듯 가쁜 숨을 내쉬며 손을 내미는 이에 남준의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 ...who are you? (누구세요?)


- 아, Chosen에서 오셨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피터입니다.
 (오, 조선에서 온거 맞지? 반가워 나는 피터야 )


- 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김남준입니다.
 (아, 만나봬서 반갑습니다. 김남준이라고 합니다.)


- 반가워요. 준? 제임스한테 미리 연락 받았어.
  이리와. 머물 곳 알려줄게요.


- ..? 아, 예. 예예... 



서툰 한국어로 자신을 이끄는 그에 조금 당황한 남준이 뒤이어 그를 따라갔고, 자신을 피터라고 소개한 그 남성은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 내 친구들 중에 조선 다녀온 친구 많아. 다들 좋아했어.
  So, I like Chosen too. (그래서 나도 조선 좋아해요) 

- 아, 여기가 준이 묵을 곳이군요. 저희 집은 2층이고 1층에는 빵집이 있어요.
  (아, 여기가 이제 준이 머물 숙소야. 우리 집은 2층이고,
   1층에는 베이커리가 있어)

- bakery, 빵집. 알아요?


- 알아요. 경성에도 빵집이 있어요.
  (알아요. 경성에도 빵집이 있습니다.)


- 좋아! 그럼 짐 풀고 좀 쉬어요. Good night!




싱긋 웃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떠난 피터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남준이 가방을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어떠한 목적이 있어 이곳에 온건 아니지만, 어쨌든 엎질러진 물이니 뭐라도 해봐야지 라는 마음이 현재로서는 굴뚝같은 그였다.

미국이란 나라는 현재 전 세계에서 각광받으며 최고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렇기에 저 하나 정도는 어떻게 하든 먹고살수는 있을거라는게 그의 주된 생각이긴 했지만.


2층에 올라서 잠시 경치를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잠시 맞은편의 작은 가게에서 멈춰섰다.

1층 코너에 있는 세 네평 남짓할만한 작은 가게. 제대로 된 간판이 없으니 뭘 하는 가게인지는 묘연하지만 분명히... 동양인이었는데.


눈에 익숙한 얼굴을 찾은 그의 얼굴이 점차 긴장에서 풀어졌다.

2층에서 내려다본 그곳에는 체구가 아담해보이는 여성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빠르게 박스들을 옮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도움이라도 주려고 1층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 I... can I help you...? ..혹시 조선분이십니까..??


- .....?

- 저요..?


- 아,! 조선분이셨구나..! 반갑습니다. 저는 저 건너편에 머물게 됐는데,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 .......?




갑자기 나타나서는 통성명을 하더니 다짜고짜 도와주겠다 나서는
그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본 그녀가 한마디를 던졌다.





- 그거 생각보다 많이 무거워요. 비싼거라.


- 괜히 들다가 흠집내지 마시고 갈길 가시는게 좋을것같은데.



- 의도는 감사하지만, .. 괜찮습니다.



- 아... 아, 예. 





얼결에 무턱대고 주워든 박스를 바닥에 다시 내려놓은 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 사이 빠르게 박스들을 가게 안으로 옮긴 그녀는 여전히 앞에 서있는 그를 흘끗 쳐다봤고.





-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이건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 예? 예, 예..! 가능합니다! ..근데 뭐...를,


- ㅋㅋㅋ일단 가게로 들어오세요. 좁지만, 





다시 얼결에 가게 안으로 들어온 남준이 신기하다는 듯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좁은 내부와는 다르게 옆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 탁 트인 느낌이었는데, 가게 구석 이질적이게도 단색의 천막이 드리워진 자리에 늦은 오후의 햇빛이 스며드는 모양새가 퍽 낭만적인 곳이었다.



- ...여긴 뭐 하는..


- 사진관이에요. 작지만, 이래봬도 단골손님들이 꽤 계시다고요.

- 아, 이쪽으로 오셔서 이것좀 도와주실래요?

- 제가 키가 작아서 저 선반 위까지 손이 안닿거든요.


- 아, 예, 예..! 뭐, 뭐를...


- 저기, 박스 안에 있는 렌즈들을 하나씩 선반 위에 나열해주세요.
  아래쪽은 제가 할테니까 위쪽만 부탁드릴게요.


- 예..!


이게 뭐라고 이렇게나 비장하게 대답하는지. 군기가 바짝 들어간 그의 대답에 소리내어 웃은 그녀가 그에게 렌즈들이 담긴 박스를 건넸다.

이렇게 순진해가지고 이 눈뜨고 코 베이는 뉴욕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이것 봐봐, 낯선곳에 거리낌 없이 발부터 들이다니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놀림 속,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비싸다는 렌즈에 혹여나 손자국이 나지 않게 조심해서 만지는 남준의 입술이 한껏 진지했다.








***









- 다... 한것같은데...

- 아, 저도 다 끝냈어요. 감사해요. 덕분에 빨리 끝냈네요.


- 저기 빵집 좀 가서 뭐라도 드실래요? 도와주신거에 보답할겸, 제가 살게요.


- 아... 안그러셔도 되는데.. 이건 그냥 제가...


- 제가 불편할것같아서요. 그리고... 이래야 다음번에도 도와주실것같아서? ㅋㅋㅋ부담 가지지 말고 오세요.

- 여기는 조선이 아니라 미국, 그것도 뉴욕이니까. 괜찮아요.



싱긋 웃고는 거리낌 없이 그를 이끄는 그녀에 남준이 쑥쓰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나섰다.


아까 피터가 말했던 1층 베이커리. 

창가자리에 나란히 앉은 둘은 그제서야 서로를 마주보며 대화를
시작했다.

조금 긴장했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과 뉴욕에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한 남준과, 그런 그의 모습마저 즐거운 듯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 그녀의 이름은 다인. 영어로는 다이엔이라고 했다. 그러니 그냥 편한데로 부르라고도.

아버지를 따라 5살 때 미국에 오게 되었고, 지금의 사진관은 아버지의 사진기를 가지고 자신이 직접 차린것이라고 얘기한 그녀는 사진을 제 업으로 삼은것에 대해 만족한다고도 했다.





- 나는 꼭 찍고싶은 사진이 있어요. ..지금은 조금 부족할지라도, 언젠가는 꼭 찍을 수 있는 날이 오겠죠?


- 홀로 사진관까지 운영하는걸 보면 그런 사진 쯤이야 빠른 시일 내에 찍을 수 있을겁니다.

- 혹시라도 찍는다면 저한테도 한번 보여주십시오. 



- ㅎ, 그럴게요. 




다시 한번 그를 향해 미소지어보이는 그녀를 보고 살짝 귀 끝이 빨게진 남준이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해보려는 찰나,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주문한 빵을 들고 왔다.

아니, 빵이라기보단 케이크에 더 가깝겠지만.




- 이거 드셔보셨어요? 


- ...아, 아니, 먹어보진 않았는데.. 이건 처음... 봅니다.


- 에이, 자, 지금 한번 드셔보세요. 제가 한국 음식이 아무리 그리워도 미국에서 이거 못먹는건 포기 못했어요. 

- 치즈케이크에요. 아, 치즈는 우유를 굳혀서 만든거. ..어, 우유는 그러니까, 


- 그정돈 압니다. 치즈랑 우유. 먹어 본 적이 있긴 한데... 이런 모습으로는 처음이라..


- 빨리 드셔봐요. 이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디져트거든요.


- 아, 그럽니까..? ....그럼, 






세모나게 잘린 치즈케이크의 끄트머리가 포크에 잘려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다인은 두 눈을 감고 어찌 보면 특이하게 치즈케이크를 맛보는 그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 어때요? 맛이,



- ..어....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달고, 고소한데.. 묘하게 시고 씁쓸한 맛이 납니다. 음... 






케이크 한조각을 다 삼킨 듯 천천히 눈을 뜬 남준과 다인의 눈이 마주쳤다. 







- .....맛이 그대를... 닮은것 같습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첫 맛이였다.








***









그날 이후 남준과 다인은 그 베이커리에서 자주 만났다. 그의 집에서는 그녀의 사진관이 아주 잘 보였고, 혹시라도 그가 밖에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오는 날이면 그녀는 베이커리에서 앉아 치즈케이크를 먹고있었던 적이 자주 있었으니까.

반복되는 일상은 그들은 편안하게 만들었다. 반복되는 취업 거절에도 그는 다시금 도전했고, 그 중심에는 다인의 위로와 조언이 있었다고 남준은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치지 않는건 아니였다. 아직까지도 그는 뚜렷한 목표가 없는 상태였고, 계속되는 거절과 부정적인 말들은 자주 사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곤 했으니.






- .....사진찍는게 그렇게 좋습니까. 맨날 하는 일인데 질리진 않아요? 


- 음.. 사실, 그것보단, 그때 하는 말을 좋아해요.

- 말은 계속 말하면 말할수록 힘이 생기거든요.



- ...무슨..



- .......... 조명, 카메라, 액션,


사격








- 아....






좋았던 기억을, 아니, 꿈꾸는 장면을 상상하듯 가볍게 감긴 눈과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 그러다 일순간 진지해진 표정을 차례로 지켜보는 남준은 순간, 눈앞에서 플레시가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빛은 너무 강렬하고 또 밝아서. 머릿속이 환하게 지워지고 그저 그녀 하나로만 채워진 느낌은 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벅찬 울림을 주어서.

이제 자신은 그녀 없이는 잘 살지 못할것같다고. 몇 달 전 그날 이후 이제 습관처럼 먹는 치즈케이크처럼. 얼마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자신은 이미 그녀에게 흠뻑 스며들어 버렸다고.










photo

- ... 혹시, 제가 다섯번 더 취업거절 당하면 사진관에 취직시켜주실수 있습니까? 


- 음..? 나 그렇게까지 돈 많지 않아요. 나 하나 먹고살기도 빠듯한걸요..?

 
- 처음 몇달은 일도 배워야 하니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저.. 역시 하나보단 둘이 일이 더 편해지니까. 

- 그리고.. 손님도 더 늘어날 수 있고요.



- 흐음.... 생각 한번 해볼게요. 근데, ㅎ ....좋을것같기도 하고,
 ..모르겠네요.




- ...취업 거절 10번 당하면 그러기로 해요. 설마, 그 안에는 되겠지.


- ..... 지금부터 부지런하게 일자리를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그 횟수 다 채우려면.


- 하하하하하! 취직할 생각을 해야지 거절받을 생각부터 하면 어떡해요? ㅋㅋㅋㅋ


- ㅋㅋㅋ 그럽니까? 거절 받고 나서 얻을 일자리가 너무 탐나서, ㅎㅎ







마주보며 웃는 시간이 달게 흘러갔다. 가끔가다 있는 특별한 날들도 모두 우릴 위해 펼쳐진것처럼 느껴질 만큼.

이제 남준은 집 아래층 베이커리만큼 그녀의 사진관도 자주 들렀다. 서툰 손길이지만 렌즈에 내려앉은 먼지를 조심히 털기도 했고, 그녀가 사진을 인화하려 암실에 있을 땐 수시로 바닥을 쓸기도, 의자를 닦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날, 그는 처음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펼쳐놓은 천막 안의 의자에 앉아봤다.

 








photo

뉴욕의 거리가 훤히 보이는 자리. 탁 트인 길에서는 제 갈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세삼 느껴지는 이곳이 선연한 타국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와닿는 곳이었다.



- 그 자리, 생각이 많아지지 않아요?


- 예..? 아, 언제 나왔습니까.?

- 아까 전에요. 남준씨 표정이 좀 심각해보여서 말은 안했지만.


- ........

- 여기 처음 앉아보는 사람이라면.. 다들 그럴 것 같습니다.
- ...괜히 어색해지고, 긴장되는게.



그녀의 말에 호응하려 말하는 것이 아닌, 정말 그랬다.
살짝 까끌한 겉면의 가죽 의자와 발 밑으로 넓게 펼쳐진 천. 눈 앞에 바로 서있는 이질적인 카메라와, 바로 옆 창문으로 탁 트여 보이는 뉴욕 거리의 전경. 

혹 누군가 지켜보진 않을까 꺼려지다가도 그 전경이 머릿속에서 떠올라 다시금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그 자리는 유독 그렇게 만들었다.




- ... 그래서 그런가.? 거기 앉아서 사진찍는 분들 표정이 다들 굳어있더라고요. 

- 아...

- 미소라도 띄면 좋을텐데. 입꼬리를 늘여서, 이렇게_



자신의 입꼬리를 늘여 미소지은 그녀가 눈꼬리마저 베시시 접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말하기만 해도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가는 마법이 생긴다면 바로 돈주고 사겠다며 구시렁거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서 배회했다. 또 다시 눈 앞에서 빛이 점멸했다.



- 치즈,


- 네?



- 치즈... 어떻습니까...?

- 말하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단어.


- ㅋㅋㅋ 남준씨 치즈 너무 많이 좋아하는거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치즈를 말하면서 웃진 않을텐데.


- 아니, 그런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치즈를 천천히 발음하면







- 이렇게.....


photo





- .......




-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고요.







창에서 반사되는 노을이 깊게 패인 그의 보조개에 담겼다.
그때만큼은 다인도, 아무런 대답 없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홀린듯 천천히 오르는 입꼬리는 순간 그녀의 눈빛에 비춘 아쉬움과 함께 지워져버렸지만.













***












그 날 이후, 남준이 다인을 보는 날은 현저히 줄었다. 조선에서는 그만큼 미국에 머물렀으면 됐으니 객기는 그만 부리고 이만 돌아오라는 전보가 하루 건너 오고, 이제 그의 수중에 있는 돈도 거의 떨어져가니
어쨌든 돌아가야할것만 같은데. 조선으로 향하는 배는 이달 보름.
이제 떠나면 적어도 반년 뒤에야 그녀를 볼 테고. ....이렇게 아무 말 없이 떠나는건 아닌것같은데. 나와 그녀 사이에 약조한 것을 꼭 지켜야 하는데.

무책임한 생각이지만 그냥 다 버릴까 라는 생각도 어렴풋이 했다.
역사에서 구두닦이를 하던, 노상에서 신문팔이를 하던 닥치는 대로
돈을 모은다면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머리로만 생각하고 정작 실행하지는 못하는 내가 더 한심하다.
나는 여전히 부모님의 지붕 아래에 머물러있는걸까.



 

photo


그녀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답을 찾을 수 있을텐데. 하다못해 반년 후에라도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조를 할텐데. 그녀의 사진관은 계속 닫혀있었고, 수시로 눈길을 주던 베이커리 창가에도, 자주 산책을 나가던 길가에도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떠나지 않았다는걸 확인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느 늦은 밤, 간헐적으로 켜졌다 꺼지는 사진관의 불빛 아래 분주해보이는 그녀의 실루엣을 보는 것. 


그것마저 무언가를 챙기곤 또 사라져버리는 그녀 탓에 뭘 어떻게 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보고 싶었다.




만난지 얼마니 됐다고 이런 감정이 앞서는지 부지기수지만, 내 마음만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함께 보내던 시간 하나하나가 좋았다고. 시간마다 한 조각씩 바뀌는 노을의 그림자도 좋았고, 이젠 나도 습관처럼 먹는 치즈케이크의 씁쓸한 뒷맛도 좋았다고. 이곳에서의 조각난 기억들을 맞춰보면 결국 그녀인데. 이렇게 헤어질 거라면 나는 이제 어떡하라고.




이렇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용납이 되질 않는다. 그 날 이후, 틈만나면 그녀의 옷깃마저 붙잡으려 온 신경을 집중하던 남준은 두세번 허탕을 친 끝에야 그녀와 대면할 수 있었다.
그 날은 그가 미국을 떠나기 전 날이었고, 보름에 가까워진 달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 저기.. 다인씨..!



- ..... 

- 남준씨...?



- 이 시간까지 안자고.. 뭐해요...?


- ...기다렸습니다. 전할...말이 있어서..


- ...?





- ..........

- 좀... 걸을까요..?








그녀와 나란히 걷는 그의 심장이 질주했다. 체감상으로는 이 길을 전력질주로 달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고대하고 만난 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없었고, 그저 말없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였다. 스치듯 지나가는 시간은 달콤하지만 그만큼 썼다. 순조로웠지만 무언가 답답했다. 왜인지 나만 보고싶어 마음을 썩였나 싶어 씁쓸했다.








- ....내일이 보름입니다.


- 그렇네요.


- ...다인씨는,.... 보름달에 소원을.. 빌어 본 적이 있습니까..?



- .. 보름달에 소원이라...

- 마냥 내키진 않는걸요.



- ...왜....




- 달은 뜨고 지잖아요. 달이 가장 큰 보름달에 빈 소원이 언젠가는 초승달처럼 작아질까, 그러다 없어질까 두려워요.

- 빌 때는 간절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죠. 



- ........



- 저는 보름달에 소원을 비는 것을 좋아합니다.



- 유성이 떨어질때 비는 소원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떨어지는 유성 때문이 아닌, 그 찰나의 시간에 간절히 비는 소원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지는게 맞다는 말처럼.


- ......달이 변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움직이는 거니까.




- 달이 가장 잘 보이는 보름에 빌었으니 우리는 변해도 소원은 변하지 않겠죠. 그러니 내가 잊지 않는 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반드시.




- ......


- ㅎ.. 뭔가 철학적이네요. ...남준씨 말이 맞는것같아요.













나란히 걷다가도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싱긋 웃는 그녀. 
이 시간이 그저 영원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이 기억이 향기처럼, 여운처럼 남아 나를 감싸주기를.


부디, 내 곁에서 영원하기를.




























.
.
.





***








다음날_





침대에서 일어나 습관처럼 확인한 창문 밖의 사진관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물빛의 하늘은 점차 하늘빛으로 넘어가고, 뿌옇던 새벽 안개가 차츰 걷혀지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남준은 느릿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무언가 찝찝하게 남아 걸리적거리는 이 감정이 가벼운 아쉬움인지 묵직한 미련인지조차 모른 체. 


마지막 남은 만년필과, 겉옷마저 챙겨 팔에 걸친 남준은 1층 베이커리에서 피터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항구로 향했다. 배의 출발 시간은 저녁 9시. 아직 한참 남은 시간이지만 또다시 습관처럼 그 거리를 거닐었다.


그는 그의 손에 들린 것이 모두 다인을 위한 선물이란것을 깨닫고서야 다시금 제가 머물던 거리로 돌아왔다. 죽치고 사진관에 앉아 기다려볼까도 약간 고민했다. 나는 정작 오늘 떠난다는 말조차 아직 전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헤어진다면, 이렇게 부서진다면. 전하지 못한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쏟아져 발끝에 넘실거릴것 같았다.





저녁 8시. 하나 둘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하고 멀직한 항구는 배가 들어와 어수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그가 그 거리에서 기다린 3시간 남짓한 시간에 하나 깨달은 것은 그녀는 아마 오늘 이곳에 오지 않으리란 점.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은 그저 좋은 벗, 그것 하나였다는 점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달콤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그저 속절없이 빠져든 저가 미련하다가도 마냥 질책하기에는 매 순간 빛나는 추억이었어서. 제게 뉴욕은 결국 이런 도시로 기억되겠구나. 그리고 나는 또 이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가겠지. 


조선에 돌아가면 치즈케이크를 만들어 팔아야 하나.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허튼 생각이 발을 맞췄다. 이제는 정말 가야 할 시간이다. 처음 올때보다 반으로 준 짐을 들고 멀리 보이는 항구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마다 가로등이 열을 맞춰 서있고, 저녁시간이 되자 되려 한산해진 거리와 반대로 집집마다 불이 켜져있는 건물들. 항구에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거리는 더욱 한산해지고, 주변은 어수선해졌다. 괜히 짐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쪽 손을 슬쩍 주머니에서 뺀 남준이 무슨 일 있나 싶어 고개를 돌렸을 때, 별안간 귓가를 관통한 총성이 그를 멈춰세웠다.




본능처럼 돌아가 소리의 근원지를 찾는 시선이 이리저리 뒤흔들려 어지러웠다. 그리고, 일순 환하게 뜬 보름달 아래로 마치 환상처럼 날아오르는 누군가의 인영에, 그는 뒤통수를 한대 후려맞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기어코 움직여 반대편으로 달려갈때 거짓말처럼 배의 뱃고동 소리가 크게 진동했다. 그리고 동시에 한 번 더 들리는 총성. 


이제 집 밖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건물 곳곳마다 불이 켜져 왁자지껄하게 울리는 집들도 없었다. 






어째서? 왜?







머리로는 어서 저 배를 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지만 발은 그 반대로 총성이 난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산 스카프가 손 위에서 구겨져 흩날리고, 덜렁거리던 모자는 끝내 떨어져 길바닥에 널부러졌다. 순간 날아올랐던 그 인영이 그녀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지만 그냥 그랬다. 내가 처음에 그녀를 보고 눈을 때지 못한것처럼. 지금도 내 모든 감각과 믿음을 붙잡고 뒤흔드는 것은 바로 그녀였다.










어째서 이 빌어먹을 예감은 틀려먹지를 않는지. 그는 자신이 불과 한 시간 전까지 유령처럼 배회하던 그 거리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은 상황을 마주했다.


길 한구석에, 거짓말처럼 쓰러져있는 다인과 그녀 옆의 라이플 한 자루. 그리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숨소리. 참아내는 신음.





이 모든 상황이 말이 안 된다 부정하면서도 그는 그녀를 안아들고 사진관으로 향하고 있었고, 손끝에 묻어나는 뜨끈한 피와, 식은땀에 젖어 헐떡이는 그녀의 숨 따위는 한번도 상상한 적 없는 광경이었다고.


그리고 그때, 두번째 뱃고동이 그의 머리를 관통했다.










- .........


- .....



급하게 사진관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커튼까지 친 남준은 벽에 기대 거친 숨을 몰아쉬고있는 다인에게 달려갔다.

땀에 젖어 축축해진 앞머리와, 버석하게 일어나 창백한 입술. 죽을 힘을 다해 신음을 참아내는 그녀와, 이미 사진관 바닥을 물들이고 있는 붉은 피.



그는 그녀에게 소리치듯 다그쳤다. 아니, 울부짖는것 같기도.






- 왜... 왜 총을 들고 이렇게 위험하게 삽니까..! 왜!!

- ...그냥 좋아하는 사진만 찍으면서 살지.. 왜.... 


- ...남준.. 남준,씨.... 어서 가요. 빨,리 

- 나랑 있,었다는거..... 하, ..들켜서는 안돼..


- 말하지 말고 있어요. ...빌어먹을, 피는 왜이렇게 안멈춰..!!!




그녀에게 주려고 샀던 하늘하늘한 스카프가 얼룩덜룩한 핏물이 들어갔다.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들듯 들어오는 불빛과,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소리. 서둘러 피가 울컥울컥 쏟아져나오는 복부를 지혈하려 압박하는 그의 손을 제지하는 그녀의 차가운 손마저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 ....남..준씨,.. 떠나야 하잖아요.. 조선,. 으로. 

- 어서 가요. ..... 나는, 여기.. 내버려두고......


- 허튼소리 말고 있어요. ...언젠가.. 꼭 찍고 싶은 사진이 있었다며.
  그거 꼭 찍어야죠. 예?


- .......ㅎ...





언뜻 피가 비친 그녀의 입가가 느리게 올라갔다. 마치, 내가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던 그 순간처럼. 





- ....이게, ...내가.. 찍,고 싶었던...... 사진..이었어요.  

- 미안해요.....



- 예. 좀 미안해 해요. 미안하면 제발... 제발 살아요. 




- ...낭만적인, ...뉴욕의.. 마지막,이.... 이래서... 


- ..미안해요.........







고통에 덜덜 떨리던 그녀의 몸이 일순 멎었다. 애초에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처럼. 그녀를 안고 있던 손에서는 더이상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데. 금방이라도 일어나 움직일것 같은데. 모든것이 멈춘 듯 고요히 흘러가는 시간에 마지막 뱃고동이 길게 울렸다. 아주 길게. 이제 더이상 돌아오지 않을것처럼.


나는 아직도 그녀가 찍겠다 한 마지막 사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가 내 품에서 숨을 놓는 순간을 잊지 못했다. 모든것이 다 허상같았다. 어두운 사진관 속에 홀로 숨을 쉬는 나도. 내 품에서 그림처럼 잠든 그녀도. 커튼 아래로 부서지는 불빛. 산산히 부서지는. 부서져버린.
































***



주인이 나타나지 않는 가게는 금방 팔렸다. 그녀의 정성이 묻은 카운터를 느리게 손으로 쓴 남준이 불현듯 이래 서랍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아마 그녀가 쓴 듯한 글 하나를 발견했다.




[ shoot, 그때에 이르러 부디 도망치지 않길. ]





그리고 녹슨 총알과, 흠집이 난 렌즈.



아....... 그가 바람처럼 깊이 탄식했다. 순간 온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듯 어지럽고 눈앞이 이지러지는 경험은 그때가 유일할것이라고. 본디 영단어는 한 단어에 여러 뜻이 있었다고. 그러니 shoot 이라는 단어에 담긴 다른 의미에 다가서지도 못한 것은 제 잘못이라고. 사진을 찍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그녀가 셔터를 누르는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줄은, 어찌 알았을까.








그는 그 길로 카메라를 들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죽음이 변화시킨 유일한 일이자 언젠가 다시금 비춰지고도 남을 일. 그는 그녀의 일을 이었고, 기어이 함께 걷기로 하였다고. 그게 그의 사랑이고, 마지막 최선이었으니. 








photo


1년 뒤, 남준은 조선으로 돌아갔다. 사진을 업으로 삼은 경성 제일의 호부의 아들. 그는 평생을 그런 잡일에만 바쳐 산다는 조롱을 들으며 살았고. 자신은 누르지 못한 방아쇠를 당기는 대신 같은 의미의 사진을 찍었다. 시대를 건너 역사를 넘어 길이길이 이어질 순간을.
그저 묵묵히 담아냈다.



그게 그의 인생이었고, 뒤이어갈 그녀의 흔적이었으니.























































































photo


다이엔, 내가 그날 빈 소원은 그런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대는 보름달에 비는 소원은 그리 간절했다가도, 언젠가는 
지는 달처럼 줄어들까 내키지 않는다고 했었죠. 
내가 그날 빈 소원은 당신의 곁에는 항상 빛으로 가득 들어찬 보름달이 뜨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그대는 마지막으로 눈담은 보름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겠군요. 옅은 달빛에 의지해 써내려가는 편지가 유난히 야속한 밤입니다.

다이엔. 
내가 걷는 길이 부디 그대와 발 맞춰 걷는 길이길.



ps. 즐겨먹었던 치즈케이크를 두고 갑니다. 이 기억만은 그대에게도, 내게도 좋은 추억이었음은 분명할테니. 

_1927년, 뉴욕 















끝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