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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의 발견

새는 사람이었다.
기계는 기계였다.
기계는 녹슬어 있었다. 그리고 잠들어 있었다.
기계가 잠을 잘 수 있느냐 묻는다면, 글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계는 정말 잠을 자고 있었다. 두 눈을 감고,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그게 새가 발견한 기계의 모습이었다. 아주 정교한 장인의 손길이 깃들어 있는듯이 양철로 만들었을 몸에는 살결과 같이 보드라운 분홍빛이 감도는. 기계는 너무나 사람같아보였다. 새는 기계에게 저의 겉옷을 벗어 덮었다. 기계는 아주 완벽한 나신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새는 기계를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매일 찾아와서 하는 말이라곤 없었다. 그저 기계가 하는 것을 그 큰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계가 새를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기계이기 때문에. 기계는 감정 따위 가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슬픈 표정은 지을 수 있지만 눈물은 흘릴 수 없고 사랑에 빠진 표정을 지을 수는 있지만 그 창백한 목덜미나 붉은 입술에 키스 따위를 하려고 하면 그저 요지부동으로 굳어버린다는 것이다. 새는 그런 점에서 기계가 좋았다. 나신인 몸을 가릴 옷가지를 들고 왔고 배를 채울만한 음식을 가져왔다. 새가 올 때마다 기계는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창가 아래에서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두 눈을 감고,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그렇다고 해서 늘상 자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기계는 거의 자지 않았다. 새는 가끔씩, 아니 기계를 보는 그 모든 시간 동안 그저 기계를 보고 있었다. 단 하나의 감상자. 기계는 아마도 새가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새는 그렇지 않았다. 감상자가 되기에 새는 지쳐 있었다.

“저기.”

기계가 처음 말을 했을 때 새는 깜짝 놀랐다. 마침 낡은 나무판자를 손보는 중이었다. 기계의 목소리는 굉장히 거슬렸다.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는데 새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기야, 새가 기계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은 단 한가지 밖에 없었다. 새가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도 기계는 그 말간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띠며 새를 바라보았다. 새는 문득, 그 얼굴을 찢어버리고 관절을 부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당신은 누군가요?”

기계는 그토록 아름답고 동시에 추악한 음성으로 오로지 그 말만 내뱉었다. 새가 기계를 발견한지, 기계가 있는 그곳에 오고 가기 시작한지 딱 한달 째 되던 날이었다. 낯선 이와 통성명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시간이었다. 그래서 새는 답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며 시가를 피웠다. 젠장, 빌어먹게 오래 걸렸다. 차라리 답을 하는 편이 나았을까. 기계의 시선을 느끼면서 담배를 피우는 건,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새는 생각했다. 담배갑을 보니 돛대가 남아있었다. 새는 눈그늘이 진 얼굴을 들어 기계에게 말했다. 위스키. 있어요? 기계는 두 눈을 깜빡였다. 없으면 말고요. 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
“마침 한 병 있거든요.”

기계는 바닥의 낡은 나무판자를 맨발로 밟으며 부엌으로 가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냈다. 꽤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그 위스키에서는 러시아의 냄새가 났다. 그제서야 새는 브랜디가 있냐고 물어볼걸, 하고 후회했다. 기계는 위스키잔에 술을 반쯤 담아주었다. 새는 만족스럽지도, 그렇다고 해서 만족스럽지 않지도 않은 얼굴로 잔을 받아들었다. 돛대에 불을 붙인 뒤 그대로 위스키 잔에 넣었다. 도수가 높은 술과 불이 만나자 불꽃이 일었다. 기계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날 밤에 기계는 처음으로 다른 것을 했다. 마치 이것을 보여주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놓아야만 했던 듯이. 마시지도 않을거면서 왜 가져다 달라고 했냐는 타박도 없이 기계는 고분고분 위스키 잔을 치웠다. 그리고서는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가 거의 제 몸집에 가까운 커다란 캔버스를 들고 왔다. 그다음에는 유화 물감을, 그 다음에는 여러가지 붓을 가져왔다. 기계는 그 모든 것을 준비했다. 마치 매우 신성한 의식 같아보였다. 기계는 이내 캔버스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황혼이었다. 아니, 칠흑 같은 밤이었다. 아니,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기계는 모든 시간을 캔버스 하나에 담고 있었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 같아보였다. 새는 비어져나오는 구역감을 간신히 억누르고서 물었다.

“이게 뭐예요?”
“당신은 가소롭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기계가 말했다. 수줍어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기계는 표정은 지을 줄 알았다.

“예술을 하고 싶었어요.”

새는 발작을 하듯이 기계에게 팔레트를 던졌다. 팔레트를 던진 뒤엔 오른손이 마구 떨렸다. 이까짓 일로 경련이 일어나는 오른손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기계는 도저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눈으로 새를 바라보았다. 새는 구태여 읽으려 하지 않았다. 기계는 감정을 느낄 수 없으니까.




새는 기계가 있는 그 저택으로 가는 대신에 화실로 갔다. 이젤 하나를 두면 턱없이 비좁은 곳인 탓에 화실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했다. 화실로 들어서자 더운 기운이 피부에 닿았다. 거기엔 J가 있었다. 그는 새를 보더니 말했다. 하나도 안 팔렸어. 그러니까 그 말의 뜻은 돈을 주어야 하는 사람은 J가 아니라 새이며,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새가 아니라 J라는 것이었다. 새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던지듯이 주었다. J는 새의 태도가 맘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으나 그것에 대해 항의할 배짱은 없는 모양이었다. 새는 나가라는 표시를 했다. J가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자 새는 이젤 앞의 의자에 앉아서 붓을 들었다. 기계가 하던 것을 해보고 싶었다. 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것을. 모든 시간을, 동시에 찰나를 담는 것. 새는 무아지경에서 다시 눈을 떴다. 캔버스의 그림은 끔찍했다. 새는 그것을 내던졌다. 캔버스는 둔탁한 소음을 내면서 떨어졌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물감이 사방에 튀었다. 하나도 안 팔렸어. 젠장할, J의 그림자를 봤을 때부터 그를 그냥 내쫓았었어야 했다. 그래봤자 새의 작품을 팔아주는 가게의 불쌍한 비정규직을 갈구는 꼴 밖에 되지 않았겠지만. 새는 기계를 만나기로 했다. 화실을 떠나는 새의 신발에는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럼에도 새가 그곳으로 간 것은, 은연중에 기계가 자신을 내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어서였다.

“또 왔네요.”

새에게 통성명을 제안한 날, 아니 그보다는 새가 기계에게 팔레트를 던진 날부터 기계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새를 맞이했다. 그래, 뭐. 새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리고서는 한쪽 무릎을 세워 바닥에 앉은 다음 그 세운 무릎에 팔을 올리고 기계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와서 기뻐요. 기계가 말했다. 보고 싶었거든요.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새는 알고 있었다. 기계는 감정을 느낄 수 없으니까. 애초에 저 고철덩어리에게 진심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할까. 그것이 새가 기계를 혐오하게 된 이유였다.

“그림은 안 그려?”
“글쎄요.”
“왜. 잘 그리던데.”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녜요.”
“말이나 못하면.”
“당신은요?”
“안 그려.”
“안타까워요.”
“하, 글쎄.”

새는 피식 웃으면서 시가를 물었다. 기계는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순진하고 말간 얼굴이 그토록 담배 연기를 집중해서 쳐다보는 것이 웃겼는지, 거슬렸는지 모르겠다. 새는 이미 야윈 볼이 움푹 들어갈 정도로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기계의 얼굴에 뱉었다. 남김없이.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는지 기계는 캑캑거리면서 기침을 했다.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볼에는 홍조가 들었다. 새는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웃었다. 여전히 기침을 하며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기계의 시선은 여전히 새를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새는 기계가 순진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기계라도 이렇게 충동적인 무례는 용서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왜 그림을 안 그려요?”

이번엔 기계가 물었다. 새는 창밖을 응시하던 고개를 기계에게로 돌렸다.

“그냥.”
“그런게 어디 있어요.”

난…당신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무엇이든 할텐데. 기계가 말했다. 영혼을 팔아서라도. 새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그 얼굴에 담배 연기를 뱉었다. 기계는 또 다시 숨이 막혀 콜록거렸다.

“그거 알아?”
“네…?”
“난 진심으로 네가 나에게 영혼을 팔아주었으면 좋겠어.”

새가 말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기계의 신경을 긁기 위해서 하는 무의미한 냉소도 아니었다. 새는 저의 삶을 바쳐서라도 기계의 영혼을 갖고 싶었다. 그딴게 존재한다면. 만일 기계에게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영혼일 것이다. 새가 말을 마친 뒤 기계는 답이 없었다. 새는 기계를 살폈다. 기계는 울고 있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정말 그러려니까 두려워? 새가 물었다. 반은 기계에 대한 조소였고 반은 저에 대한 자조였다. 기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기계가 말했다.

“너무 행복해서요.”

그게 그렇게나 행복하다면 지금 주지 그래. 새가 말했다. 기계는 또 다시 침묵을 지키다가 새에게 입을 맞췄다. 마치 성모 마리아 상에 입을 맞추는 것처럼. 그만큼 서툴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혀를 섞는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계의 입술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리고 따스한 온기가 감돌았다. 새는 기계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기계의 순수한 그 영혼은 새의 것이 아니었다.

“……미안해요.”

기계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기계의 눈에서 왠지 눈물을 본 것만 같았다.

“무엇이?”

새가 물었다.

“오늘은…이만 돌아가서 쉬어요.”

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서는 별말 없이 그곳을 떠났다. 화실로 돌아가는 길에는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새는 유화 물감이 지워지지 않은 손으로 그것들을 한움큼 꺾어다가 성냥으로 불을 붙여 태워버렸다. 가슴은 여전히 찝찝했다. 새는 자신의 입술을 더듬었다. 왜 악마가 순수한 인간들을 좋아한다는건지 알 수 있었다. 그토록 순진한 영혼을 제가 가질 수 있다면, 새 또한 똑같이 했을 것이다.




기계는 두 무릎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새는 그 모습을 스케치했다. 완벽한 나신이었다. 사실 기계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예술을 하는 것이었다. 새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모델을 서는 것도 예술의 일종이라고 했다. 행위 예술. 요즘엔 그런거 잘 팔리거든.

“물론 쓰레기 같은 가식적인 작자들만이 향유하는 것이지만.”
“그럼 저도 하고 싶지 않아요.”
“자, 봐. 지금은 그렇게 가식적인게 아니잖아?”

그 말을 듣자마자 기계는 기쁜 마음으로 그러하겠노라 승낙했다. 새는 아주 정중하게 -그건 아마 까마득한 시간 이래로 처음이었을 것이다- 옷을 벗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말하자면 누드 모델을 서달라는 것이었다. 기계는 이 또한 기꺼이 승낙했다. 그리하여 새는 이 아름다운 육체의 나신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새는 심장이 멎을 듯이 기뻤다. 아니, 조금은 속이 안 좋기도 했다. 부지런히 연필을 놀렸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 둘만이 있는 공간을 가득 채웠다. 가끔 여름의 열기로 인해 더운 숨이 오갔다. 마침내 새는 펜을 놓았다. 잘 그린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마음이 흡족해지는 그림이었다. 이걸 팔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지난번에 J에게 냈던 것보다 더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새는 빙긋이 웃었다. 그제서야 그림이 다 완성된 것을 알았는지 기계가 여전히 옷을 입지 않은 채로 엉금엉금 기어왔다. 잘…되었나요? 그 목소리는 왜인지 떨리고 있었다. 새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기계를 마주보려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기계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새는 그림을 저의 가슴팍에 끌어당겨 감추었다. 기계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저기……그림을 볼 순 없을까요?”
“아니.”

새는 희게 질린 낯으로 자르듯이 말했다. 기계는 상처입은 표정을 지었다.

“왜…”
“안돼.”
“한번만-”
“네가 지금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더 다가오면 찢어버릴거야.”

새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 그림을 높이 치켜들었다. 기계가 잡지 못하게. 기계 또한 일어났다. 그리고서는 그 하얗고 매끄러운 나신으로 제자리에서 뜀박질을 하며 어떻게든 그 그림을 보려고 했다. 마치 새의 그림을 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듯이. 할 수만 있다면 새 또한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토록 아름답고 순수한 피사체는 저의 실력으로 담아낼 수 없다는 걸 진작에 알았어야 했을텐데. 이제 이 그림은 무척이나 추악하고, 혐오스러워졌다. 새는 이것이 세상에 알려져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기계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서는 기계가 이러한 모습일거라 생각하는 것은 끔찍했다. 오, 안돼. 기계는 새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정확히는, 그 아름다운 몸을 옷처럼 두르고 있는 순수가. 새는 기계를 확 밀쳐냈다. 그 부실한 몸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넘어졌다. 그리고 새는 그림을 집어들었다. 안돼요! 기계가 소리쳤다. 그것이 아마도 기계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였을 것이다. 새의 손은 그림을 찢어내려갔다. 분명 애정의 선이 깃들었을 종이는 힘없이 찢겨나갔다. 안돼…안돼…제발…… 기계는 이제 온 몸을 파르르 떨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새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새는 마음이 아팠다. 그것이 이토록 힘없이 추락하는 자신의 예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림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아파하는 기계 때문인지.

“제발 그만해요……”

끝내 기계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기계가 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새는 그림을 찢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림을 바람에 떠밀려보냈다. 가식을 두르고서 이 그림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품평해버릴 사람의 손에 들어갈 바에는 예술의 예 자도 모르는 사람이 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차마 저의 손으로 쓰레기통에 넣을 용기는 없었다. 때문에 새는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떴다. 기계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장소는 지구상에 단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자신의 화실로 가는 길에 새는 A를 만났다. 그림가게의 주인, 그러니까 불쌍한 J의 고용주였다. A는 꽤나 매력적인 얼굴에 싱긋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축하해.”
“무엇을요?”
“J가 말해주지 않았었나? 네 그림을 꾸준히 사가는 사람이 있다고.”

새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왠지 떳떳해졌다. 저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단 하나의 감상. 단 하나의 감상자. 기계가 원하는 것을 새 또한 원하고 있었다. 어쨌든 둘은 동족이라는 것처럼. J, 그 빌어먹을 개자식을 패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였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P는 밀린 돈을 줄테니 다음에 가게에 들르라고 말했다. 다시 기계를 찾아가겠노라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는 이미 밤이 된 뒤였다.




“나 왔어.”

그러나 공간은 침묵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기계는 자고 있을까? 아니. 기계는 잠을 거의 자지 않았다. 새는 닫힌 방문을 열었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새는 깜짝 놀랐다. 기계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왔네요.”

기계의 목소리는 많이 놀란듯이 숨이 가빴다. 기계는 나신이 아니었고 쪼그려 앉아 있었다. 기계가 입고 있는 얇은 셔츠는 많이 비쳤다. 못보던 생채기가 눈에 띌 정도로. 이게 뭐야? 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난…정말 미안해요.”

기계의 목소리는 다시금 물에 젖어 있었다. 새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 이런 것 때문에 새가 기계를 갈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기계는 아마 아까의 그 그림이 찢긴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했다. 새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뭘하고 있었어? 새는 기계가 쪼그리고 앉아 맞추고 있었던 퍼즐 같은 것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친숙했다.

“이건……”

찢어서 버린 그 그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일차적으로 분노보다는 놀람이 앞섰다.

“…주우러 뛰어다녔어요. 한두시간 정도요. 머, 멀리는…! 안 갔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난 정말 당신의 그림이 보고 싶었어요. 새는 기계에게서 시선을 뗐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그저 기계에게 매우 미안해진 탓이었다. 기계가 사과할 이유는 없었다. 정말로.

“그래서 다친거야?”

기계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화 안 낼거야. 새가 말했다. 기계의 얼굴은 여전히 침울했다.

“그런데 저 그림들은……”
“보지 말아요!”

기계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새는 별빛에 비친 야속한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방의 벽을 꽉 채우고 있는 그림. 대략 스무 장 정도 되어보이는 그 그림들은 모두 단정히 걸려 있었다. 새는 그제서야 알았다. 이것들은 자신의 그림이었다. 이게…왜 네게……새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본 그 그림들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난번에 기계가 보여준 그 황홀한 그림에서 본 것처럼…

“잠깐.”

새는 기계의 그림과 저의 그림을 대조해보았다. 그 무섭고도 냉랭한 침묵이 감도는 동안 기계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믿을 수가 없었다. 새는 저의 머리를 몇번 쓸어넘기다가 기계를 향해 돌아섰다. 합친거야? 새가 물었다.

“내 그림들을, 조각내어 합친거냐고.”

기계가 콜라주를 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기계의 그 황홀한 그림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새의 화풍과, 새가 주로 사용하는 오브제를 기계는 이 방에 올 때마다 수십번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기계가 그 그림에서 독창적인 사고를 한 것이라고는 그저 그 요소들을 배치한 것 뿐이었다. 새는 헛웃음을 뱉다가 화를 내다가 울기를 한복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기계는 여전히 바들바들 떨면서 수도 없이 용서를 빌었다. 새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그것은 어느덧 광기의 형태를 띄었다. 내가, 내가 고작 이따위 것 때문에. 새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기계에게 다가갔다. 고작 이따위 것 때문에 그렇게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자신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기계에게 순수를 달라고 한 것도 순 멍청한 짓이었던 것 같았다. 새는 공포에 질린 기계를 향해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고작 너 따위 때문에.”
“미안해요, 당신을 속일 생각은 없었어요. 믿어주세요 제발…!”
“너 같은 건 말이야.”

새는 기계의 가녀린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몸체에서 거칠게 잡아당겨 분리시켰다. 기계는 고통에 차 울부짖었다. 이상하게도 평소에 보여주던 그 말간 웃음보다 오히려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예술을 할 자격이 없어.”

분명 후회할 터다. 언젠가는 광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테니. 그러나 새는 멈추지 않았다. 그만해달라고 발버둥치는 기계를 두고. 팔을 뽑았다. 다리를 뽑았다. 그것만으로 시원치 않아서 관절을 부수고 온갖 작은 부품으로 분해시켜 박살냈다. 볼트와 너트가 사방으로 튀는 광경은 볼만했다. 더. 더. 더. 새의 머릿속은 외쳤다. 더러운 놈. 사기꾼이야. 절대 살려두어선 안돼. 내 예술을 멋대로 자르고 이어붙여 날 그렇게 고통스럽게 했잖아? 그래, 결국 내 열등감의 근원은 뭐였지? 나는 고작 콜라주나 다름없는 그림에 아파한거야. 그런 그림에 밤잠을 설치고 비참해지고 죽고 싶어지고 날 폄하하게 된 거라고. 그런 그림에! 그렇게 도둑맞은 그림에!

“제발……미안해요……너무나도……”

기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상하다. 새는 광기가 자신의 눈마저 잠식해버렸다고 생각했다. 기계는 울 리가 없는데.

“제발 그만해줘요……아파요……너무…너무 아파요……”
“닥쳐.”

닥쳐, 닥쳐, 닥쳐, 닥쳐! 새는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그리고서는 끝까지 남겨두었던 가장 큰 조각을 뽑아냈다. 숨이 넘어갈 듯이 빌고 울던 기계는 조용해졌다. 그런 정적 속에서 몇 분을 보내고 나서야 새는 자신이 방금 뽑아낸 것이 기계의 머리였음을 인식했다. 새는 가쁜 숨을 고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살인의 현장 같았다. 부품들은 널브러져 있었고 기계의 팔다리는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으며 기계의 머리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새는 비명을 지르며 기계의 머리를 떨어뜨렸다. 공허한 소리가 났다. 미친듯이 바닥을 기면서 다시 흩어진 부품들을 찾았다. 안돼, 안돼, 안돼. 새는 속삭였다. 누구에게 속삭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깨어나, 살아나. 드라이버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새는 기계를 다시 조립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이 미친듯이 경련했다.




기계는 꼬박 일주일을 잠만 잤다. 새는 기계의 옆을 지켰다. 울며 보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장담컨대, 새에겐 더는 흘릴 눈물이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지긋지긋한 매미의 소리가 한풀 꺾였을 때, 기계는 살며시 눈을 떴다. 새는 기계를 보기가 두려웠다.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순진무구한 얼굴이 저에 대한 깊은 증오를 품게 되었을 때를 마주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힘들었다.

“거기 있는거 다 알아요.”

기계가 말했다. 여전히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안 들어올래요?”
“……”
“저 외로워요.”
“…그럴 리가 없잖아.”

말이 평소처럼 퉁명스럽게 나왔다. 새는 주춤거리며 기계가 누운 방으로 들어갔다. 기계는 해사한 웃음을 지으며 새를 마주보았다. 당신은 제가 언제부터 예술을 하고 싶었을 거라 생각해요? 기계가 물었다. 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있잖아요, 저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 혼자 있었어요. 기계는 다시 말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난 여기 있었는데, 전부 기억해요. 여기 어떤 존재들이 있었는지. 작은 꽃이 태어나고 사라질 때마다 난 얼마나 깨어있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나는 그냥 어느 순간부터 존재했어요. 갑자기 여기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기계의 눈은 어느 순간 공허하게 느껴졌다. 새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 관두었다. 기계는 그런 새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을 맞췄다. 지난번보다는 덜 서툴었다. 새는 피식 웃었다.

“당신은 제멋대로예요.”

기계가 티없이 웃었다. 원래 인간은 변수투성이이죠. 어쩌면…나도 그럴지 몰라요. 고장난 기계. 어떤 결함이 있는지도요. 그래서 저는 예술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으음, 생각해보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외로웠거든요. 당신의 말처럼요. 영원히 살고 싶었어요. 내게 말을 걸어줄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알다시피 이곳은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많이 떨어져 있잖아요.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제가 맨 처음으로 간 곳이 바로 미술관이었어요. 수백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조차 말을 걸 수 있었어요. 그들에게서 답을 받을 수도 있었어요.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슬픈 그런 답들이요. 하지만 전 여전히 예술을 하는 법을 몰랐어요.

“그러다 한 그림가게에 걸린 당신의 그림을 봤어요.”
“……”
“그런데 그게 제게 말을 걸었어요.”
“……”
“그리고 전……”

기계가 잠시 말하기를 멈추었다.

“당신을 꼭 만나고 싶었어요.”

그림이 아닌 당신이 들려주는 당신의 목소리는 얼마나 더 멋질까 혼자서 매일밤 그려왔어요. 언젠가 보여줄게요. 제가 용기가 생기면.





새는 기계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계는 이 상황에 심취한 듯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새는 기계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어리석었음을 알 수 있었다. 새의 그림 속 요소를 사용하지 않아도, 새의 화풍을 따라하지 않아도 기계의 그림은 아름다웠다. 그것의 근원은 기계가 가진 순수였다. 저를 조각낸 사람에게도 몇번이고 사랑한다 말할 수 있는 순수함. 그건 아마 사회에 찌들고 찌든 새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것일 터였다. 기계는 마침내 그림을 완성했다. 한 마리의 새가 캔버스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를 태운 채로. 새는 물었다. 새를 타고 있는 이건 뭐야? 기계는 수줍어 하면서 대답했다. 저요. 제 모습이에요. 새는 평소처럼 냉소적으로 굴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이 무슨 어린아이 같은 그림이냐 타박할 수 있었겠지만 감히 그럴 수 없었다. 기계가 그린 그 그림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새는 당장이라도 그 그림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기계는 맑게 웃으며 자신의 캔버스 옆에 앉았다. 새는 그런 기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계의 재능을 여기에서 썩히고 싶지 않았다. 기계는 새에게 제멋대로라고 했지만 그 본인도 만만치 않은 변덕의 소유자였다. 기계는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 그림을 그렸다. 주기적으로 그림을 그려 돈을 충당해야 하는 새나 다른 화가들과는 달랐다. 오른손의 경련이 일어났지만 새는 개의치 않았다.

“나랑 같이 살지 않을래.”

새가 물었다. 기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이토록 불완전한 고백이 어디 있을까.

“내가 널 더 큰 세상으로 이끌어 줄 수 있어.”

내 등에 널 태우고 널 더 넓은 곳으로 데려다줄게. 네가 모르는 높은 하늘을 탐험하게 해줄게. 새는 정말이지, 가소롭게도 그렇게 말했다.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그림이 한 점 팔릴까 말까 한 무명의 화가니까. 그럼에도 새는 그렇게 약속했다. 기계는 제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새가 먼저 입을 맞췄다. 기계의 입술은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기계의 피부를 만져본 적은 없었다. 새는 기계의 피부가 그토록 따뜻하다는 것에 놀랐다. 새하얀 몸에는 온통 열꽃이 일어있었다. 기계는 새를 더욱 깊숙히 받아들이면서 새의 이름을 불렀다. 몇번이고 되뇌어 불렀다. 새는 그때마다 대답했다. 기계의 목덜미에 파고들어서도 대답은 멈추지 않았다. 새는 이따금씩 짖궂은 장난을 쳤다. 그때마다 어쩔 줄 몰라하는 기계의 모습은 퍽 사랑스러워 새는 장난을 멈추고 다시금 그를 품에 안았다. 여기저기에 그의 표식을 남겼다. 기계의 몸은 어느새 새의 캔버스가 되어 있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도화지에 새는 자신을 그 무엇보다도 깊이 새겨넣으려는 듯이 굴었다. 기계는 그런 새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새는 기계에게 입을 맞추고 더 나아가 서로의 살덩이를 취할 때에, 마지못해 기계의 순수를 취하는 것이라 자기암시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계의 순수는 이런 식으로 빼앗을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새의 머릿속은 기계라는 존재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에는 무일푼의 무명 화가였던 과거를 생각했다. 그리고 기계의 순수를 취한 다음의 미래를 생각했다. 과거는 지긋지긋했고 미래는 두려웠다. 그러나 기계는 오로지 새에게만 집중했다. 새에게 더 파고들며 저 자신을 내어주었다. 새는 그 점이 미치도록 싫은 동시에 미치도록 좋았다.




새는 물감을 개었다. 붓이 차가웠는지 피부에 닿자 기계는 작게 움찔거렸다. 조금만 참아. 새는 이미 수도 없이 키스한 목덜미에 또 다시 입술을 부딪혔다. 그리고서는 기계의 등에 핀, 아직 가시지 않은 열꽃의 흔적을 이어 별자리를 그리기 시작했다. 기계의 하얀 맨등에서 빛나던 별들은 어느새 꽃이 되었다. 새는 기계의 등에 핀 백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감은 금방 말랐다. 새는 저가 그린 꽃들에 도장이라도 찍으려는 듯이 하나하나 입을 맞추었다.




“전시라는걸 해보는게 어때.”

새가 넌지시 물었다. 기계는 어제와 같은 침대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넌 아직 세상에 알려진 작품이 없지만, 분명 네 그림은 미술관에 걸릴 가치가 있어. 새가 말했다. 기계는 조용히 말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새는 기계의 팔을 꽉 쥐었다.

“아냐, 할 수 있어.”
“전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새는 헉 하고 숨을 급하게 들이키는 소리를 냈다. 기계의 그림에는 기계의 영혼이 깃들어있었다. 그렇게 거대한 것을 기계는 새의 손에 쥐여주려 하는 것이다. 새는 그것을 받기에 너무나 작았다.

“…그럼 처음에 예술을 하려고 했었던 건? 미술관에 걸려야 영원히 살 수 있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죽는거나 마찬가지야.”
“당신이 기억해줄테니까요.”
“난 그럴 수 없어. 난 언젠가는 죽을테니까.”

기계는 새에게 많은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기계는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리고서는 곧장 캔버스 앞에 섰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붓놀림은 평소와는 달랐다. 색채 또한 달랐다. 기계는 풀을 빨갛게 칠했다. 하늘도 붉었다. 태양은 시리도록 파랬다. 기계는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물감을 온통 뿌리기 시작했다. 잭슨 폴록의 그것처럼. 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의 기계의 행동이 바로 예술이었다.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예술 그 자체였다. 심지어 기계조차 지금의 이것을 그대로 재연해낼 수 없을 것이다. 새는 그저 넋을 놓고 기계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관절을 비집고 들어가는 물감마저 기계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익사하려는 것만 같았다. 물감에. 그리고 예술에. 기계는 몇번 비틀거리다가 새에게 이마를 기대며 쓰러지듯이 앉았다.

“…알아요. 당신은 발화하고 소진하는 생명체이고, 저는 영원히 살겠지요.”

기계가 말했다. 물감이 온몸에 튀어 만신창이가 된 채로. 그러나 그 말을 하는 기계의 모습은 마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을 향해 손을 뻗으려는 것과 닮아 있어서 새는 그를 밀쳐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 했다. 그런 몸으로 영원히 살 순 없었다. 관절 사이사이로 들어간 물감이 굳어버리면 기계는 아마 영원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헝겊인형처럼 널브러져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술이 기계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는 것이었다. 이 무시무시한 진실을 깨달은 순간에 새는 견딜 수 없는 혐오감이 솟구쳤다. 너는 살고 싶잖아. 그렇지 않니? 이 빌어먹을 예술놀이가 어떻게 시작된건데. 새는 단지 기계의 손을 꽉 잡았다. 차가웠다. 기계는 약간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새는 기계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새는 말했다.

“나랑 영원히 살자. 번식하지 않아도, 사회적인 사람이 되지 않아도, 예술을 하지 않아도 영원히 아름다울 수 있어.”

기계는 그저 옅게 웃었다. 전 저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쳤어요. 기계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 모든 것을 의미했다. 새도 알고 있었다. 서로의 온기를 적나라하게 느꼈던 그날에 새는 자신의 짐을 모두 옮겼으니까.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던 기계에게 새는 멋쩍은 듯이 웃어보이며 말했다. 앞으로는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어. 기계는 그 말을 듣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새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날밤, 기계가 보지 않고 있을 때 새는 자신의 붓을 모두 꺾어버렸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기계였다. 그의 예술은 기계를 통해서 성취될 수 있었다.




기계가 물감을 개었다. 기계의 그림 속에서 새는 추할 정도로 그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새는 약간 혐오감이 들었다. 모델을 선 사람도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누드 모델이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사실, 기계는 서로의 체온을 나눌 때와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지만 새가 완강히 거절했으므로, 그런대로 아쉬운 마음을 삭혀야 했다.

“밖으로 나갈래요.”

기계가 말했다.

“진짜 세상에 있는 것을 그려보고 싶어요.”

그래서 새와 기계는 밖으로 나갔다. 마침 풀이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새는 기계가 이젤을 펼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런 곳에서는 영 재능이 없었다. 기계는 얌전히 앉아 그림을 그렸다. 지난번에 새의 혼을 빼놓았던 역동적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새는 한창 그림에 몰두한 기계를 멀리서 스케치 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기계한테 보여주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럼 기계는 분명 무언가 더 천재적인 것을 끼워넣을 것이 분명했다. 새는 종이를 들고 기계에게로 다가갔다. 기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새를 올려다보았다. 새는 기계가 그리던 그림을 보았다. 싱그러운 풀은 보기 싫게 비쩍 말라있었다. 새는 아까의 초상화보다도 더한 혐오감을 느꼈다. 새는 기계의 손에서 성급히 붓을 빼앗았다.

“네가 자연에 가까운 색을 표현할 때까지 이 색은 압수야.”

기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내 화가 났다. 어째서 기계는 편한 길을 내버려두고 그토록 난해한 길을 가려고 하는걸까. 기계의 실력이라면 분명 그림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모두 없어졌다고 생각한 열등감마저 고개를 디밀었다. 아무리 아등바등 애를 써도 결국 넌 저것을 따라잡지 못할거라고. 새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미술관에 걸리지도 못해.”
“하지만 전…”
“미술관에 걸릴 작품을 그려내는 것이 곧 나를 위해서 그리는 거야. 알겠어?”

그 뒤로 기계는 무수히 많은 색을 빼앗겼다. 다채롭고 화려했던 그림은 빛깔을 점점 잃어갔다. 그러나 새는 이것이 옳다고 굳게 믿었다. 기계도 언젠가는 이해할 것이다. 그런 존재였으니까. 언젠가 박물관에 걸리고 나면 알게되겠지. 결국 이것이 옳았음을. 새는 점점 사실적으로 변해가는 기계의 그림에 흡족해했다. 태양은 따스한 노란빛이었다. 풀은 싱그러운 초록빛이었다. 기계의 어린아이같은 순수는 색을 바꾸자마자 무척이나 큰 기량을 발휘해냈다. 생생했다. 마치 카메라로 찍은 듯이. 새는 카메라를 딱 한번 만져보았었다. 그것도 까마득한 어린시절에. 새를 가르치던 사람은 결코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선생님이 아니었다.




새는 가끔씩 저의 스승을 회상하곤 했다. 비록 그 사람이 새에게 가르쳐준 것이라고는 순수를 잃어버리는 방법과 자신의 예술을 강요한 것 뿐이더라도. 결과적으로 새는 화가가 되었으니 그는 성공한걸까. 새는 고개를 젓는다. 화가라는 길 밖에 없었기 때문에 화가가 되어버린 것이라고, 새는 아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새는 화가가 ‘되어버린’ 사람이었다. 예술을 사랑하는 방법 밖에 배우지 못했으며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배우지 못했으니. 새의 스승은 흰머리가 성성한 노인이었다. 고아원 출신의 어린아이를 맡아서 자신의 예술을 가르쳐주는. 그러나 스승은 새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외워, 외우란 말이야! 그의 스승은 그렇게 새를 다그쳤다. 쓸모없는 것, 멍청한 것! 새의 스승은 예술을 너무나도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새의 화풍과 새의 방식을. 빌어먹게도 그는 새를 카메라로 만들어놓았다. 젠장, 그가 제일 혐오하는 것이 카메라였음에도. 그는 카메라를 질색했다. 예술가들의 밥그릇을 빼앗은 간악한 과학의 산물이라고 온갖 신랄한 욕을 다 해댔다. 동네 꼬마애가 빌려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본 날, 새는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맞았다. 그리고 벌로 나흘간 잠도 자지 못하고 그림만 그렸다. 아직도 가끔씩 일어나는 오른손가락의 경련은 그때의 후유증이었다. 새는 그의 마지막 제자였다. 말년 동안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폭력적으로 굴던 그는 자기 집 창가에서 떨어져 죽었다. 먼 밀밭에 나가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쏜 것도 아니고 늙어서 곱게 죽은 것도 아니었다. 새는 거기에 있었다. 멍든 몸, 찢겨진 마음으로 그의 스승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형체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으스러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때 웃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새는 젠장, 웃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웃는 것이 좋으니까. 새장에서 풀려난 새가 웃어야지, 울어야겠는가.




“그런데 말이야.”

기계는 탐스런 입술을 살짝 내민 채 열 개 남짓한 물감을 팔레트에 짜고 있었다. 기계가 고개를 들자 어젯밤 새가 마음껏 키스했던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살짝 덮었다. 새는 턱을 괸 채로 담배를 폈다. 이번엔 시가처럼 좋은 것은 아니었고, 싸구려였다. 키치. 말하자면 그랬다.

“카메라처럼 그리는 것은 너무 어색하지 않아?”
“어색하다는건,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뜻이지. 카메라처럼 그릴 것이라면 화가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
“화풍을 바꿔보자는 얘기야.”

기계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해야 하죠? 전 잘 모르겠어요. 새는 다가와 기계의 손을 잡았다. 자, 봐. 이렇게 하는거야. 그리고 새는 마음껏 붓을 놀렸다. 기계의 얼굴엔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순수했다. 여전히, 새가 사랑하고 증오하는 그 모습 그대로. 오랜만에 쥔 붓의 촉감은 눈물이 날 정도로 익숙했다. 이토록 완벽한 무아지경에서 새는 마침내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한데 엉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마치 왈츠를 추는 것 같아보였다. 물감이 뒤범벅인 왈츠. 물통이 엎질러지고 팔레트는 밟혔다. 붓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새는 기계와 이 세상의 모든 춤을 다 추어보고 싶었다. 캔버스, 이젤, 그리고 기계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계의 숨이 가빠오는 것처럼 가팔라졌을 때 새는 마침내 기계의 손을 놓았다. 자, 어때.

“…이상해요.”

긴 침묵 끝에 기계는 말했다. 새는 그 대답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예술을 찬미하던 단 하나의 존재가 내놓은 답은 그거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자 애쓰는 티가 역력한 새의 얼굴은 이상하게 뒤틀렸다. 반문하고 싶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대답해주세요.”
“……”
“이 그림은 제가 그린 건가요?”

새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던 담배의 연기를 한껏 들이마신 뒤에 늘상 하던대로 기계의 얼굴에 대고 뱉었다. 기계는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었다. 새는 이리저리 뒤척였다. 옆에서는 기계가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기계는 부쩍 잠이 늘었다. 그 까닭을 물으면 기계는 부끄럽다는 듯이, 피곤하다고 말했다. 이상하다. 기계가 피곤할 리가 없을텐데. 새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의 화실로 갔다. 그림이 무척이나 많았다. 더러는 벽에 걸릴 자리가 없어 바닥에 놓였다. 채 마르지 못한 그림에서 물감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새는 기계의 그림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어린아이같이 맑고 힘찬 선들. 연약하고 다정한……새는 그곳에서 잠을 청했다. 아무래도 그곳이 둥지인 것 같았다.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기계가 새를 깨울 때까지, 새는 거기에서 잠을 잤다. 기계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새를 깨웠다. 일어나요. 그가 노래부르듯이 말했다. 새는 뒤척이다가 일어났다.

“오늘은 뭘 가르쳐줄거예요?”

기계가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새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오늘은 인물화를 해보는게 어때. 자화상으로.”

자신이 뱉어놓은 말에 저가 놀랄 지경이었다. 참으로 투명하고 어찌보면 순수하게 드러난 욕구였다. 기계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울 앞에 앉았다. 능숙한 솜씨로 캔버스를 편 후에 몇 안되는 물감을 팔레트에 짰다. 그리고선 연필 없이 바로 붓을 움직였다. 새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어제 시범을 보여주었는데도 카메라 같았다. 누가 같은 기계 아니랄까봐. 팔짱을 끼며 기계가 그리는 모습을 바라보다 새는 문득, 자신이 카메라를 혐오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망할 노친네 덕분인가. 그 생각을 하자 더는 견딜 수가 없어졌다. 새는 망설임없이 앞으로 가 기계의 손에서 붓을 낚아챘다. 기계는 어리둥절해서 새를 올려다보았다. 새는 그것을 허공에서 꺾었다. 짧은 소리와 함께 그 붓으로는 더 이상 그릴 수 없어졌다. 기계는 처음에는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을 하더니 곧 그 큰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화풍을 바꿔보자고 말했었잖아.”
“알아요, 하지만……제 그림이잖아요.”
“날 만족시켜준다며. 벌써 잊었어?”

기계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새는 한숨을 쉬었다. 오늘은 이 정도만 해. 기계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울었다. 평소 같았으면 울지 말라고 온갖 다정한 말을 덧붙여가며 안아주었을 텐데. 왠지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새는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기계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새는 먼저 그 자리를 떴다. 모든 것이 다 지긋지긋했다. 새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제는 별로 피우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젠장. 새는 피지도 않은 담배를 던져버렸다. 그 담배가 어디에 떨어졌는지 새는 젠장, 신경이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오늘은 왜 그림 안 그려?”

새가 물었다.

“안 그려요.”

기계는 두 무릎을 끌어안고 비가 내리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그것과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새는 물었다. 위스키 있어? 기계는 고개를 설설 저었다. 새가 어깨를 으쓱했다. 또 다시 그 고약한 취미가 도진 모양이었다. 새는 기계를 일으켜세웠다. 그리고 얇은 손목을 붙잡고서 화실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나흘간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로지 그림을 그리며. 자신이 그랬듯이. 하지만 기계는 힘들어하지 않을 것이다. 굶주림에 아픈 배를 부여잡고 살려달라 울지도 않을 것이다. 손에 경련이 생기지도 않을 것이다. 새는 알고 있었다. 화실에 들어온 뒤 새는 문을 잠갔다. 거울도 치워버렸고 커튼도 닫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 너무나도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이. 자신이 마주하기에 너무나 추악한 죄악을 짓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기계는 두주가 되어서 화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말수가 줄었다. 그림을 그다지 많이 그리지도 않았다. 새는 그런 기계를 다그치고 싶었다. 하지만 감히 그에게 부담감을 주어선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저 평소처럼 기계를 안고 동이 틀 때까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파고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기계에겐 버거워보였다. 기계는 새를 힘껏 밀어냈다. 눈물이 고여 있었다. 새는 기계에게 저의 손을 던졌다. 기계의 고개가 힘없이 돌아갔다.




새는 어느날부턴가 제가 압수한 색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압수한 물감은 찬장에 넣어 두었었다. 기계가 감히 손을 뻗지 못할 곳에. 절도범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하기에 첫째, 이곳은 사람들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고 둘째, 도둑이 물감만 훔쳐갈리 만무했다. 새는 오늘도 사라져 있는 물감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깨워줘야지. 그래야만 했다. 기계는 아직 너무나도 순수한 탓에 모르는 것이다. 세상이 어떤지. 이제 겨우 등에 태워 세상을 구경시켜 주려 하건만 기계는 그것을 자꾸만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새는 기계가 있을 방으로 한발짝씩 옮겼다. 노크를 했다. 대답은 없었다. 두어번 더 노크를 하자 안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그리고 새는 자신이 본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기계는 짐을 싸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뒤였다. 새는 멍하니 기계를 바라보았다. 멍청이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새는 쥐어짜듯이 말했다.

“어디 가려고?”

기계는 대답했다.

“밖으로요.”

새는 그대로 기계의 멱살을 잡았다. 지난번처럼 관절을 모두 끊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들끓었다. 기계는 그래서는 안됐다. 어떻게 감히 떠난단 말인가. 기계가 새를, 어떻게 감히. 기계는 멱살이 잡혔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 모습에 새는 격노했다.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물건을 던졌다. 기계는 평온했다. 새는 따져 물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소리쳤다. 함께 날아오르자던 약속도 다 잊은 거냐고 화를 냈다. 기계는 만신창이가 되어가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새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새는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공허한 눈동자가 무서웠다. 기계는 짐가방을 들고서 말했다.

“안녕.”
“……”
“잘 있어요.”




1년만에 편지가 왔다. 장례식장 주소란을 따라 가니 미술관이 나왔다. 미술관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전시해두는 곳에 기계가 있었다. 앙상하고 메마른 모습으로. 새는 아래의 설명란을 보았다. ‘지난 1년간 미술계를 휩쓸고 지나간 요절한 천재의 박제. 그는 유언장에 자신의 시신을 박제하여 남겨달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새는 이제 저것으로 기계의 새, 그리고 마지막 소식을 들었다. 이제는 기계의 소식을 들으러 젠장할 미술관에 매일 가지 않아도 되었다. 새는 다시 기계를 올려다보았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그를. 몇 개념없는 이들의 낙서인지 듬성듬성 ‘준서♡︎예진’ 처럼 영원하지도 않을 사랑의 증표나 ‘FUCK YOU’처럼 그냥 정말 멍청이들의 흔적이 기계의 몸에 그려져 있었다. 새는 화가 났다. 물티슈를 꺼낸 다음 낙서를 벅벅 문질러 닦았다. 새의 옆에서는 견학을 왔는지 학생 무리와 도슨트가 있었다. 도슨트는 밝고 명랑한 소리로 말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생전에 남긴 기록물에서 ‘이것은 나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다.’ 라고 명명한 작품이에요. 사람들에 의해 조금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름답지 않나요? 도슨트를 쫓아다니며 설명을 듣던 새는 곧 그것을 관두었다. 도슨트를 따라다니고 있을 아이들이 불쌍했다.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은 저게 아니었다. 기계는 저런 고철덩어리가 아니었다. 훨씬 더 아름다웠고 훨씬 더 사랑스러웠다. 새는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찰나를 담은 박제라느니 하는 말을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 있기가 힘들었다. 사실 이 모습은 그의 가장 추한 모습이었는데. 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가장 추한 모습을 남겨버린건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에 열광했다. 굳어진 아크릴 물감이 살결에 고스란히 남은 기계에게.
새는 드디어 이 모든 것에 환멸을 느꼈다. 입안에서 쓴맛이 느껴졌다. 먹은것이라고는 요 사흘간 아무것도 없었는데. 새는 기계의 발에 쓰인 FUCK YOU 하나를 더 지웠다. 그것과 동시에 기계의 발에 남아있던 물감자국이 지워졌다. 새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등을 돌려 미술관을 벗어났다. 밖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예술은 눈처럼 퇴적될 것이다. 새는 이미 눈이 두껍게 쌓인 바닥에 꿇어앉아 눈의 결정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새의 결정은 보이지 않았다. 새는 추위로 인해 빨갛게 된 손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눈밭에 누웠다. 소름끼치게 차가웠다. 그러다 새는 문득, 자신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흐르는 족족, 물감이 되어버리는 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