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을 죽인 시녀
4. 잠자리의 길



4. 잠자리의 길



_

메리는 그를 조금이라도 기다리게 할세라, 한시가 급하게 단정한 드레스로 갈아입고선 저택의 뒤뜰로 뛰어갔다.


아셀 브랜튼
아, 메리 양.

정원사의 손길이 깃든 그곳 뒤뜰에는

아셀이 여유롭게 담장에 몸을 기댄 채 메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셀 브랜튼
오시는 길엔 별일 없으셨을까요?


메리 앤
다행히도 이곳과 제 방이 그리 멀진 않아서요.

그러자 아셀은 도통 알 수 없는 미소로,


아셀 브랜튼
글쎄요. 우연은 아주 찰나에도 일어나는 법이랍니다.

하며 그녀에게 공손히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얼떨떨했지만, 아마도 잡으라는 표시겠지 싶어 메리가 그 위에 제 손을 살짝 포갰다.


아셀 브랜튼
그보다 다행이네요.


메리 앤
다행이요?


아셀 브랜튼
만약 제 형이라도 마주쳤다면, 하는 생각에 걱정이었거든요.

흠칫-


메리 앤
...

듣는 메리의 표정에 급격히 그늘이 졌다.

재판 전에 나눈 대화가 곱지 못했던 탓일까? 그녀는 윌이 제게 어떤 분풀이를 할지 벌써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메리 앤
저... 첫째 도련님은 지금 어디에...


아셀 브랜튼
왜요, 해코지라도 할까 싶어서요?


메리 앤
아니...! 아니에요.

무척이나 울 것 같은 안색으로 고개를 내젓는 메리.

아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기라도 하듯 지긋이 응시했다.


아셀 브랜튼
농담이에요.


메리 앤
...네.


아셀 브랜튼
아무리 아버지 일과 얽혀 있기로서니,


아셀 브랜튼
우리 형이 설마 메리 양을 괴롭히기라도 하겠어요?


메리 앤
...


아셀 브랜튼
참... 본론은 이게 아닌데.

싱긋-


아셀 브랜튼
일단 자리를 옮겨요.

아셀은 무거웠던 공기를 단숨에 바꾸어,

뒤뜰의 안쪽과 맞닿아 있는 녹음이 우거진 숲의 입구로 메리를 인도했다.

_

_


아셀 브랜튼
미안해요.


아셀 브랜튼
메리 양은 유독, 잔뜩 놀려주고픈 매력이 있어서 제가 자중을 못했네요.


메리 앤
그런데 도련님, 여기는...

숲의 중심부까지 들어와선지, 벌레들이 찌르르 울어대는 소리와 작은 새들이 어여쁘게 노래하는 소리가

함께 어울려 하모니처럼 들려왔다.


아셀 브랜튼
아름다운 곳이지요?


메리 앤
네... 정말.


아셀 브랜튼
가끔씩 혼자 생각을 정리할 때 오곤 하지요.


아셀 브랜튼
여긴 저택 사람들도, 심지어는 윌 형도 잘 찾아오지 않는 곳이거든요.

메리는 이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그건 단지 이 울창한 숲이 주는 중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셀 브랜튼
게다가...


아셀 브랜튼
비밀을 털어놓기에도, 퍽 좋은 공간이잖습니까.

아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메리 앤
비밀이라니요...?

그는 여전히 얄궂게 웃고 있다.

다만 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윌과는 달리, 그 웃음에는 무엇도 배어나오지 않았다.


아셀 브랜튼
아시면서.

메리의 뒷목에 별안간 한기가 끼쳐왔다.

저벅 저벅-


메리 앤
도련...님...?

마냥 장난스러워 보이던 모습은 일찌감치 사라져버린 뒤. 아셀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메리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아셀 브랜튼
궁금한 게 있어요.


메리 앤
왜...


아셀 브랜튼
이제 와 물어보는데,


아셀 브랜튼
설마 분신자살 같은 허무맹랑한 말에 안심하고 계셨던 건 아니죠?


메리 앤
...!!


아셀 브랜튼
정신병이니 뭐니, 가당키나 하겠어요. 그 작자가 얼마나 독종인데.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넣고, 더이상 거리낄 게 없는 사람처럼 메리에게로 걸어왔다.


아셀 브랜튼
왜 저를 피하시는 거죠?


메리 앤
가까이... 오지 마세,

턱-

때마침 뒷발에 걸린 기다란 나무 뿌리에, 놀란 그녀의 몸은 넘어질 듯 휘청거렸다.

덥석-


메리 앤
읏...!

한 팔로 단단하게 허리를 받쳐준 아셀이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셀 브랜튼
그를 죽인 건 당신이면서, 메리 앤.

_

_

메리는, 바라지도 않은 에스코트를 받아 다시 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셀은 떠나기 전에 침대에 망연하게 구겨앉은 메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셀 브랜튼
오늘 이야기를 너무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아셀 브랜튼
저는 메리 양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으니까요.

그것이 무슨 뜻일지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메리 자신이 바라던 평범한 일상은 영원토록 오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메리 앤
자백을... 할까.

이대로라면 자진해 목을 밧줄에 내걸고 오든지, 이곳에서 영영 속이 곪아 죽든지 하는 선택지들밖에 없었다.

풀썩-


메리 앤
으... 으흐...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우는 소리가 방문에 채 닿지 못하고 뭉개졌다.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남자를 너무도 쉽게 믿어버린 것이 문제였다. 아니, 그것보다는 마음을 놓지 말았어야 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의심을 한몸에 받고 풀려난 사형수가, 이렇게 멀쩡히 일상으로 돌아올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


메리 앤
...다 끝났어.

곳곳에 미움과 원망이 도사린다.

메리 자신은 사람을 죽였고, 응당 치뤘어야 할 죗값을 기약 없이 미루고 있는 처지다.


메리 앤
정말...


메리 앤
내가 죽어야 끝나는 거지...

그러나 아무리 이 세상에 순응하려 해도, 이토록 목을 죄어오는 감각에는 무뎌질 수가 없었다.


메리 앤
...

그녀는 짠기 어린 눈물로 적셔진, 제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하나뿐인 여동생과 헤어지기 전 작별 선물로 받은 것이었다.


하일리 앤
언니, 그거 알아?


하일리 앤
잠자리는 영혼의 동물이래.


메리 앤
영혼의 동물?


하일리 앤
지니고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이 어디에 있든 다시 빛으로 인도해준다고 해.


메리 앤
어머, 신기하기도 해라.

어린 하일리는 선뜻 그것을 메리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하일리 앤
그러니까 언니, 이듬해 꽃이 다 지기 전까지


하일리 앤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해!


하일리 앤
나는 하나도 안 지치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메리 앤
...하일리.

코끝을 간질이던 그날의 산들 바람, 제법 숙녀다운 동생의 명랑한 목소리가

거짓말 같게도 이 순간 그녀의 곁에 맴돌았다.

꽈악-


메리 앤
그래... 돌아가야 해.

펜던트를 감싸쥔 메리의 손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메리 앤
내게는 아직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순간의 치기여도 괜찮다. 이것이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릴, 마지막 동력이 된다면.

스윽-

그녀는 몇번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_

_

하녀장은 이틀내내 갇혀 있었던 메리의 몸이 성치 않을 거라며

조금의 유예를 둔 후에 일을 시작할 것을 권했지만, 메리는 사양하고 곧바로 별관으로 나섰다.


메리 앤
별관 청소는 맨 마지막 순서이니 누굴 마주칠 일도 없겠지.

실은 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 그녀는 어렴풋이, 아니,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덜컥-


메리 앤
물을 받아야 하는데...

모두가 저를 기피하고 있다는 것을.

하녀들
쟤 좀 봐, 철면피도 저런 철면피가 없지.

하녀들
살인자 주제에 뻔뻔하게 어떻게 여길 다시 올 생각을 해?

복도를 지나면 받는 따가운 눈초리와 이제는 수식어가 된 '살인자'란 소리.

홱-


메리 앤
...

하녀들
어머... 뭘 쳐다보는 거람.

별말없이 째려만 줘도 저들이 먼저 달아나 직접 부딪칠 일은 없지만,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메리는 텁텁한 심정을 삼켜내야 했다.

더이상 아무렇지 않아야 할 것들이니까.


메리 앤
소란하지도 않고 좋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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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두어 시간 뒤.

쓱쓱-

양동이를 발밑에 두고는 한참 쓸고 다니던 빗자루를 세우는 메리.


메리 앤
휴.

혼자 도맡아 한 것 치고는 이 넓직한 공간이 몰라보게 깨끗해진 모습이라, 밀려오는 뿌듯함에 어깨에 힘을 준다.


메리 앤
좋아, 물질까지 다 했으면


메리 앤
이제 연무장쪽을 해치워 볼까.

별관과 마찬가지로 야외 분수대 옆에 위치한 연무장은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야 칼같이 닫혀 있는 탓에

지금쯤 메리가 손 보기에 최적의 장소 중 하나였다.

저벅 저벅-

그곳을 먼저 찾아간 손님이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어떤 이유에서든 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_

_

피가 베어나왔다.

주륵-

한 발짝만 더 섣불리 다가섰어도 목이 달아났을 법한 상황이었다.


이안 룩펠
윌, 멈춰!


이안 룩펠
사람이라고!

남자는 다급한 외침에도 아랑곳 않은 채 살의가 깃든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윌 브랜튼
제 발로 날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메리 앤
...


윌 브랜튼
왜, 내게 용무라도 있나?

윌의 시선이 메리의 겁먹은 얼굴에서, 걸레를 든 그녀의 손으로 단숨에 미끄러져 내려갔다.



윌 브랜튼
메리 앤.

그녀가 손에 쥔 게 걸레 따위가 아니었다면, 그의 칼은 서슴없이 메리를 베고도 남았을 터였다.


메리 앤
죄, 죄송...합니다......

두려움에 다리에 힘이 빠져버릴 차에, 그와 함께 있던 남자가 달려와

탁-

칼을 쥔 손을 힘껏 내쳤다.


이안 룩펠
아무리 요며칠 힘들었다 해도 고용인한테 칼을 겨누다니,


이안 룩펠
제정신이야?


윌 브랜튼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이안 룩펠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더더욱 없지.


윌 브랜튼
...이안.

이안이라 불린 사내는 뜻을 굽히지 않는 윌을 얕게 노려보며,


이안 룩펠
어서 가요.

넋이 빠져 있는 메리를 데리고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_

_


이안 룩펠
저기, 괜찮습니까?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메리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혈을 하지 못한 가는 목에는 기다랗게 피가 고여 있는 모양새였다.


이안 룩펠
의원을 불러올 테니 잠시만-

흠칫-


메리 앤
괘, 괜찮아요!

순간적으로 커진 음성에 도리어 제가 놀란 듯 그녀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메리 앤
그게... 그러니까 저는...


메리 앤
많이 다치지는 않아서...

적어도 이곳 사람들에게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는지는 알고 있기에, 메리는 겨우 이런 일로 의원을 부르는 소동을 일으킬 용기가 없었다.

자칫 모두를 온전히 적으로 돌릴 수 있겠다는 불안감이, 지금 느껴지는 통증보다 몇 배로 거셌다.


메리 앤
정말 괜찮아서요, 저는...

어물쩍 넘어가려는 모습이 그의 의심을 살까 마음을 졸였건만,

다행히도 이안은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이안 룩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이안 룩펠
급한대로 제가 응급처치라도 해드리겠습니다.


메리 앤
네? 아니요, 더이상 폐를 끼칠 순...


이안 룩펠
가만히 뒀다간 흉이 질 텐데요. 걱정하시지 않아도 될 만큼 간단한 치료예요.


메리 앤
...

스윽-

메리는 문득 고개를 돌려, 윌이 있을 연무장을 쳐다보았다.


메리 앤
...그럼, 부탁드릴게요.

일이 점점 꼬여가는 느낌을 애써 외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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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_

세번째 남주가 드디어 나왔네요. 아직 한 명 더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로맨스인 것은 아니에요.

이 글 자체도 로맨스.. 느낌은 아닐 것 같아요. 조금 딥한 내용이지만 최대한 가볍게 써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마지막 남주는 누굴까요?

맞추시는 분께 소정의.... 제 사랑을....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