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을 죽인 시녀

5. 기사도 정신

5. 기사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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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독액을 묻힌 솜이 목에 닿자, 메리가 자못 따가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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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아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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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아니... 괜찮아요.

부스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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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다 됐습니다. 붕대는 적어도 반나절에 한 번은 갈아주어야 해요.

이안은 가벼운 처치를 마친 후 약품 상자를 정리하며 말했다.

약이라든지 하는 물건들을 자연스럽게 꺼내오는 솜씨로 봐서는 이곳에 한두 번 와본 것이 아닌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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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생각해보면, 두터운 서적만이 가득한 이 서재에 약품 상자가 있는 줄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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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혹, 궁금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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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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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아까부터 그런 눈으로 계속 보고 있어서요.

제게서 등을 보이고 있어 마음 놓고 쳐다본 것인데,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양 금세 시선을 눈치챈 이안에 메리는 횡설수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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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아뇨, 그, 상처를 봐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하려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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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하하, 감사는 이전에도 받았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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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그야 그랬지만...

축 늘어진 그녀의 말투에 살짝 웃음 지은 이안이 책장에서 붉은 표지의 책 한 권을 뽑아내며 넌지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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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제가 어째서 윌과 친분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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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그게 궁금하셨던 게 아닌가요?

이안과 윌의 관계.

메리가 방금까지 속에 품고 있던 말과는 사뭇 다른 결이었으나, 이 역시 그에게 내심 궁금한 것들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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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친우분...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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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맞아요. 서로 알게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지금 윌한테는 제가 제일 친한 친구일걸요.

윌 브랜튼은 사교계에서의 자자한 명성과 달리 남녀를 가리지 않고 거리를 두는 면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윌이 차기 백작이 될 위엄과 품격을 갖추고 있다고들 말하지만, 그의 집무실에 지난 몇 년간 출입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저택 내에서도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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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다행이에요. 도련님께도 마음을 털어놓을 분이 생겨서.

넋을 놓고 중얼거린 메리의 혼잣말을 그가 놓치지 않고 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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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측은지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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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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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전혀 아니에요, 당치도 않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이게 무슨 큰일이라고, 퍼뜩 손을 떨면서 내젓는 메리에 이안은 그만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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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큭...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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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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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화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라고 해주고 싶었어요.

그는 지난 일을 잠시 회상하듯 저 너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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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솔직히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죠. 첫만남에 어찌나 가시를 세우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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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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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기사단장 신분이 아니었다면 아마 윌과 저는 연이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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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본래 까칠한 성격이 어딜 가겠냐만은, 지금은 그 말대로 저를 믿고 의지해주는 것 같긴 합니다.

메리는 말에 맞추어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기사단장'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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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그런데 기, 기사단장이라니요?

그러고 보니, 메리가 연무장에 들어서기 전 그는 윌과 검술 시합을 하는 중이었더랬다. 태연하게 그렇다고 하며 웃는 이안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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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그래서 이런 치료에 능숙하신 거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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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전문가는 아닌걸요 뭘.

댕-

댕-

오후 4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이안과 메리가 있는 서재 안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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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룩펠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저는 조금 뒤에 훈련이 있어 그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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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어요.

메리는 꾸벅 인사하며 허공을 휘휘 가르는 이안의 손이 서재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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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아차. 나도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직 제 하루 일과가 다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황급히 저택의 중앙성으로 걸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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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윌이 메리에게 있어 누구보다 두려운 사람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 때문일 수도, 아니면 단지 메리의 죄책감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안처럼 상냥한 이가 윌 브랜튼을 친구로 두었다는 것은, 적어도 메리가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가 가진 전부가 아닐 거라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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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그렇다고 마냥 좋게 생각할 순 없지만...

메리는 깊이 빠져들수록 점점 더 복잡해지는 사념덩어리에 미간을 꾹꾹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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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그나저나. 언제 다시 찾아오는 걸까?

무심코 제 목을 손으로 매만지니, 섬세한 손길이 닿은 붕대의 감촉이 피부로 느껴졌다. 기사단장이라고 했으니 바쁠 것은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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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다시, 만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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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누구를?

화들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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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도, 도련님?

어느새 메리의 옆에 바짝 다가온 아셀이 흥미로운 듯 눈썹을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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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풀이 죽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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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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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이쪽은 다친 자국인가요?

스윽-

아셀이 상처를 가볍게 쓰다듬자, 메리의 눈이 질끈 감겼다. 뒤늦게 뒤로 물러나 봤자 뒷꿈치에 맞닿는 것은 단단한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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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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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잠깐 안 본 사이에 묻고 싶은 게 많아져서, 뭐부터 말해야 될지 고민이네요.

슬그머니 한 발짝 멀어진 그가 턱을 매만지며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아하, 얼마 지나지 않아 무언가 떠오른 듯 눈을 반짝 빛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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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우리, 티타임을 가지는 게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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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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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흠... 뭐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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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메리는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었던 숨을 작게 헐떡였다. 올려다 본 그곳에는 아셀이 길을 척하니 막고 서 있었다.

그래, 윌뿐만이 아니다. 이곳에서 경계해야 할 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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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메리. 이러면 곤란해요.

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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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윽...!

아쉬운 표정을 짓던 아셀이 돌연 메리의 손목을 낚아채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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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적어도 이곳에 있는 동안은, 제 비위를 맞추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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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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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제게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메리 양은 보살펴야 될 가족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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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그렇죠?

가족이라는 말에 메리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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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가족은 안 돼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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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그럼, 얘기 나눌 마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5시에 응접실에서 봐요. 해맑은 눈웃음과 함께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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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하아...

아셀이 협박과 함께 떠나버린 뒤, 메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려 손을 뻗었지만 힘이 부족해 복도 한가운데에 주저앉고 말았다.

털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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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하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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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이 있는 응접실에 들어선 메리의 눈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세 잔의 찻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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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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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뭘 좋아할지 몰라 일단 다 준비해놓으라고 일렀어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는 어물쩍 아셀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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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다친 건 어떻게, 조금 괜찮아요?

아까까지만 해도 애꿎은 상처를 건드렸던 게 누군데. 아무렇지 않게도 묻는 그에 메리는 입술을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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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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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어서 들어요. 차가 다 식겠어.

때아닌 재촉에 미심쩍어하면서도, 그의 요구를 더이상 허투루 넘겨버릴 수 없기에 메리는 가장 왼쪽에 있는 찻잔을 들어올렸다.

향기가 고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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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언젠가 우연찮게 한번 맡아 보았던 독초의 냄새가 꼭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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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신기하네요, 메리 양은 생각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난다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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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차를... 저을 숟가락이 필요해요.

턱을 괴고 지켜보던 아셀이 곧 비실비실 웃기 시작했다. 찻잔을 든 손이 떨려오는 것을, 그도 보았을까. 메리는 느리게 잔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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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이걸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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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하녀를 시켜 갖고 오게 해야 하는데, 방금 제가 이 층에 그 누구도 오지 말라고 해두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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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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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어쩔 수 없이 그냥 마셔야겠어요.

노랗게 우려낸 차의 표면에 그녀의 얼굴이 비췄다. 불안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셀은 여기에 독을 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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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도련님...

주저하고 있는 그녀를 앞에 두고 아셀은 제 은색 반지를 매만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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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예전에, 책에서 재밌는 걸 봤어요. 사람은 종종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투영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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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우습지 않아요? 타인 때문에 겪는다 믿었던 모든 행복, 슬픔, 근심, 불안이 실은 다 내게서 나온 거였다니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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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숨이 막힌다. 메리는 고요하게 목을 옥죄어오는 아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견디기 버거웠다. 설마, 하는 의심이 부푼 폐를 찢고 나오려 했다.

메리 자신이 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다면, 백작을 죽이지 않았다면 결코 느껴볼 턱이 없는 공포가 두 발을 옭아맨다. 어쩌면 사람을 죽여서, 제가 죽임당할 생각부터 하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아셀의 눈이 형형하게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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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마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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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덜덜 떨리는 손이 다시 찻잔을 집어들었다. 마시면 죽어. 틀림없이 죽을 거야. 그런 생각이 자꾸 드는데도.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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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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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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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메리 양은, 정말 미워할 수가 없네요.

작게 한숨 지은 아셀이 제 검지 손가락에서 끼고 있던 은반지를 벗겨내어 메리가 마신 찻잔 안에 퐁당, 던져 넣었다.

말간 찻물이 찰랑였다. 반지의 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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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셀 브랜튼

운까지 좋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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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_

여러분은 복불복 보기가 1.2.3까지 있을 때 어떤 걸 고르시는 편인가요?

저는 보통 중앙을 고릅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게 딱히 없어요. 그냥 대칭을 좋아해서 그런 것 같네요.

보기가 짝수일 경우는 묻지 말아주세요.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