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을 죽인 시녀

6. 차기 백작

6. 차기 백작

_

아셀의 반지가 무게감 있게 가라앉는다. 아무말 없이 그걸 지켜보던 메리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제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려는 낌새를 느꼈다.

쿵-

쿵-

찰나에 많은 생각이 스친다. 손끝에 머무는 찻잔의 온기부터, 눈앞에 있는 아셀의 존재까지. 너무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녀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왜...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가요.

의미없는 물음인 걸 알면서도 물었다. 당연하게도 아셀은 답하지 않는다. 조용한 냉소만이 그의 입끝에 어려 있을 뿐이다.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일전에 제가, 메리 양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달그락-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개를 하나 키운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그들 사이에 놓여 있는 찻잔이며 다과들을 한편으로 치워두고 테이블에 한 손을 짚었다. 한층 좁혀진 거리에 긴장한 메리가 의자를 꾹 붙잡았다.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제가 경매장서 값을 아주 높게 치고 들여온 개가 있다면, 기본적으로 기대하는 바가 크다는 얘기겠지요.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그게 집을 지키는 것이든, 가만히 누워 아양을 떠는 것이든.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절 능멸하시는군요.

피식, 흘리는 웃음이 신랄했다.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능멸이요?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메리 양은, 제가 당신의 인생을 사들였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겁니다.

아셀이 처음으로 표정을 약간 굳혔다. 내도록 참아왔던 것이 비하면 정말 미미한 변화라, 메리도 겨우 알아챘지만 말이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아직도 희망을 품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기는 하지만...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그것도 거슬리지 않은 정도에 한해서죠.

그는 의자에 등을 한껏 기대고는, 손잡이 부분을 검지로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천장을 향한 시선에 선이 굵은 턱이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여색이 마르지 않을 만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저는 도련님의 개가 되길 자처한 적 없습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제 명대로 죽는 게 나았어요.

무릎에 올려둔 메리의 손이 잘게 떨렸다. 잡힌 치맛자락에 우악스럽게 구김이 졌다. 그래, 차라리.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흐음...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그래.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그 말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씀이시지요?

스윽-

아셀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그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아까의 찻잔들 중 하나를 집어 메리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메리 양이 운 좋게 피해간, 니렐리아를 치사량 갈아넣은 차입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니렐리아. 그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독초종 중 하나였다. 소량이라도 먹게 되면 그 즉시 심장박동이 느려져 머지않아 완전히 숨이 멎게 되는 꽃.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걱정 마세요. 정말로 죽으면 메리 양의 가문에 부고 편지를 보내드릴 테니까요.

싱긋, 띄운 미소는 대번에 메리를 무가치하게 만들었다. 그 목숨을 장난으로 만들었고, 또한 그녀의 가족들마저 우스갯거리로 만들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그럼에도... 왜 제 입은 좀체 떨어질 기미가 없는 것인지.

메리는 그때 자신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모든 게 아셀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말은 잘도 해대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이 아닌 누군가의 의해 살려진 신세.

죽는 편이 낫다고 되뇌면서도 정작 죽음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두려워지는 오만한 인간.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아시겠나요?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이게 당신입니다 메리 양.

메리 앤 image

메리 앤

나... 난......

메리쪽으로 상체를 기울인 아셀이 그녀의 턱을 훅 잡아올렸다.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그러니 곱게 대해줄 때 감사하세요.

아셀 브랜튼 image

아셀 브랜튼

당신을 무너뜨릴 방법은 지금 당장에도 무수하니.

그의 싸늑한 음성이 한동안 메리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_

_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가까운 거리에서 메리를 지켜봐오던 하녀장은 당연하게도 그녀의 변화를 가장 빨리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영애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아보여요.

아무리 이 저택에서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그녀라 해도, 백작의 일 전에 유일하게 자신을 챙겨주었던 벨에게까지 벽을 치기란 어려웠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아... 아니에요 벨. 괜찮으니 걱정 마셔요.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둘째 도련님께 불려간 후부터 더 그러신 것 같아요.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혹시, 무슨 일이라도...

움찔-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아무 일 없었어요.

의도치 않게 정색을 한 메리가 이내 멋쩍어져서는 등을 돌렸다. 양동이에 쓰던 밀대를 집어넣으니 철퍽, 하는 물소리가 빈 복도를 울렸다.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앗...! 죄송합니다 영애님. 제가 괜한 소리를...

메리 앤 image

메리 앤

벨의 잘못이 아니에요.

메리 앤 image

메리 앤

그냥, 요즘 들어 몸이 부쩍 피로해진 것 같아요.

애써 웃음 짓는 얼굴에 벨이 도리어 어쩔 줄을 몰랐다. 착한 사람. 이런 벨을 대하기가 다른 이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의 눈빛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 거다.

지난날 살해 혐의를 받아 병사들에 끌려가는 메리를 보던, 하녀장의 흔들리는 동공이.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그러게 일은 아직 무리라고 말씀드렸는데...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게다가, 이런 건 영애님이 아니라 저희들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여기로 돌아온 이상 뭐든 해야죠. 알다시피 지금 저는 이것 말곤 할 일이...

메리가 섬겨야 할 주인, 백작이 죽었다는 걸 잠시 망각한 모양인지 벨이 온힘을 다해 당황스러워했다.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어머. 제, 제가 또 말실수를...!

메리 앤 image

메리 앤

하하... 아니에요. 다른 분들은 몰라도, 벨에게는 늘 감사하고 있어요.

화들짝 놀라하며 양손으로 입을 덮는 하녀장에, 메리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2층 창가 난간에 기대었다.

휘이잉-

동녘의 잔디밭을 타고 온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지점이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이렇게라도 말을 걸어주는 벨이 아니었다면, 저는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영애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하는 얘기였다. 그녀는 겹쳐놓은 두 팔에 머리를 픽 기댔다가, 곧 천천히 들어올린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하지만 이제부턴 그러지 않아도 되니까-

그때, 메리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누군가의 깊은 목소리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벨 양, 서둘러 부엌에 가지 않고 여기서 뭘 하고 계시는지요?

꺄악-

어느샌가 기척도 없이 바로 뒤에 와 있는 집사를 벨이 발견하고는 허공에 팔짝 뛰었다. 조금만 더 놀랐더라면 아마도 천장을 뚫지 않았을까, 싶은 정도였다.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지, 집사님?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흠흠... 오랜만에 저택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어서 가보시지요.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어린 하녀들은 더욱이 벨 양의 통솔이 없으면 난장판이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손님...이라. 예로부터 백작저로 찾아오는 발길이 뜸하다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이런 시기에 손님의 방문은 중대한 사안임이 분명했다.

하녀장 벨 image

하녀장 벨

아... 넷, 얼른 가보겠습니다!

메리는 손걸레로 창가를 닦는 체 하면서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집사의 가벼운 재촉 뒤로 벨이 뛰쳐가려는 듯 보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뒤를 따르려 했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메리 양께서는 여기 남아 계시지요.

메리 앤 image

메리 앤

...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긴히 전할 말씀이 있어 그렇습니다.

예전에도 메리는 집사와 오래 말을 섞을 일이 없었다. 그는 윌 브랜튼의 거의 유일한 측근이었고, 애당초 윈저 백작은 메리가 자신의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달갑지 않아 했기 때문이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어떤... 얘기죠?

가던 걸음을 멈추고, 조금은 어정쩡한 자세로 그녀가 제 손목을 매만졌다. 무의식적으로 집사의 발치만을 맴도는 시선은 어쩔 수 없는 방어기제였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앞으로 이런 궂은 일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메리 양께서는, 엄연한 귀족 영애분이시니까요.

메리 앤 image

메리 앤

하지만 이게 아니면 제가 이곳에 머물 이유가...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그건 어디까지나 주인님 자리가 공석일 때의 얘기죠.

의아한 내색을 숨길 수 없는 메리에 대고 집사는 정확히 그렇게 읊었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지금부터 메리 양은 차기 백작이 되실 윌 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뭐... 뭐라고요?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아, 혹시 모를 우려는 마셔도 될 것 같군요. 이건 그분께서도 동의하신 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자가 나를 쥐도새도 모르게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도대체 뭘 원하고 곁에 두길 원하겠어? 듣던 메리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아니요, 저는...

집사의 외안경이 때맞춰 번쩍 빛났다. 그 속에 비친 예리한 중년의 눈은 메리의 의중을 관통하는 듯했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죄송하지만, 이건 제안이 아닙니다. 메리 양께서 브랜튼가에 몸담고 계시는 한 불가피하게 받들어야 할 명령이죠.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저도 영애께는 예의를 지켜드리고 싶으니, 부디 더이상의 충돌은 피해주시길.

연륜이 묻어나오는 말투는 엄중하고도 절제되어 있다. 묘한 중압감에 그녀는 그만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그럼, 가시지요.

혼미한 정신을 다잡지도 못한 상태. 메리는 집사의 안내대로 따르려다가, 어느 순간 흠칫 깨어났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어, 어딜 간다는 거죠?

집사 게트 image

집사 게트

어디기는요. 당연히,

윌 님의 집무실이지요.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메리는 저만 덜렁 놔두고 걸어나간 집사의 마지막 모습을 되새기는 양, 틈없이 꽉 닫힌 문을 바라본다. 본다고 저절로 열리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집무실이라면... 도련님이 죽어도 남을 들이지 않는 곳이잖아.

'죽어도' 라는 표현은 살짝 과장되었을진 몰라도, 근 3년간 이 방에 출입한 이가 방 주인 제외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를 충분히 보증했다.

여기를 청소하라니. 생각해보면, 제게 시련을 안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은 또래 하녀들뿐만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집사 게트도 메리가 잡혀갔다 멀쩡히 돌아온 일에 대해 남몰래 불만을 품고 있을 수도 있고.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일리 있네.

선 자리에서 찬찬히 둘러본 윌의 집무실은, 우측 벽에 붙어있는 창문이 아니라면 무서울 정도로 어두웠을 분위기를 자랑했다.

주인이 그라 그런지, 음침하기보다는 무게감 있게 느껴졌다. 유광 처리가 된 앤티크 가구들 하며.

우르르-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엄마야!

책장을 손으로 훑다가 그만 책무더기에 깔리는 사태가 일어났다. 하필이면 그쪽 책들은 꺼내지도 않고 그 자리에 오래도록 쌓아두었던 건지 메리의 주위로 자잘한 먼지들이 나뒹굴었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에취, 엣취...!

메리 앤 image

메리 앤

큰일이다... 청소를 해야 하는데 더 어질러버렸어.

찡그리며 손을 내젓던 그녀는, 이윽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원상복구 작업을 시작했다. 제각기 두께가 다른 책들을 어찌저찌 빈 곳에 집어넣고 있을 때,

툭-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어...?

손 마디 크기로 작게 접힌 종이 조각이 메리의 구부린 무릎 맡에 안착했다. 왜 그랬는진 모르겠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았다.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문 앞에, 그보다 더 멀리까지 아무도 지나다니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펼쳐본다.

사각-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메리 앤 image

메리 앤

이건... 무슨 말이지...?

본토의 언어지만, 뜻을 알 수 없는 조합에 메리가 눈을 찡그렸다. 그녀가 간신히 읽어낼 수 있는 단어는 단지 하나였다.

[사랑하는 ㅡ에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무엇이든 더 알아낼 수 있으리란 확신은 없지만, 메리는 복도서부터 서서히 들리우는 발걸음 소리에 쪽지를 다급히 숨겨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 몇 초 뒤에 누군가 들어오는 것이었다.

윌 브랜튼 image

윌 브랜튼

뭐야... 넌.

메리 앤 image

메리 앤

...

내내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던, 하나뿐인 방의 주인이.

_

_

작가의 말_

안녕하세요. 많이 늦었습니다. 이번 화는 자그마치 여섯 번은 고쳐쓴 애물단지(...) 같은 회차예요.

안 풀리는 거 붙잡고 있지 말고 다른 작품을 시작해볼까도 고민해봤는데,

역시 끝마치지 않은 이야기는 찝찝하더라고요. 이것저것 보고 싶은 장면도 있고.

모쪼록 즐겨주세요.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