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해가 웃을 때

《노란 해가 웃을 때》 6화

달빛 아래 남은 자리



‘오늘 밤, 하나의 고백을 하겠다.’

노아의 그 말이
잔 안에 남은 마지막 한 방울처럼
턱 끝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아직도 등불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서련의 붉은 치마,
사람들의 축복,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말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얹힌
노아의 마지막 말.

고백.

“아기씨, 몸이 많이 피곤하실 텐데…”

뒤에서 다가온 소화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나는 겨우 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괜찮아. 아직 괜찮아.”

“괜찮아 보이진 않으세요.”

소화의 눈동자는
오늘 밤 내가 얼마나 오래 침묵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조금만 있다 갈게.”

그 말을 남기고 마루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불과 등불 사이
잠깐 어둠이 끼어 있는 지점.
그 경계에 서 있으면
내가 빛 쪽 사람인지 그림자 쪽 사람인지
조금 헷갈렸다.


나는 익숙하게 몸을 낮췄다.
어릴 적부터 들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중인이니 고개를 너무 세우지 마라.’
‘양반 예는 지키되, 양반처럼 나서진 마라.’

도성 사람들은 우리 집을
“중인 중에서도 귀한 집”이라 불렀다.

그러나 신분을 나누는 선은
생각보다 얇으면서도 잔인했다.

나는 그런 집의 딸이었다.

양반가 규수들과 같은 옷을 입었지만
같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는 사람.

그런 내가
좌의정 댁의 정혼자라니—

“그 말이… 참 무겁습니다.”

문득, 아까 노아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입 안에서 다시 중얼거렸다.

무겁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 속에 숨긴 또 다른 의미는
끝내 꺼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설 만큼 나는 높지 않다.
그 자리에 설 만큼 나는 빛나지 않는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그때였다.

“이쯤에 있을 것 같았다.”

낮고 익숙한 목소리가
등불 사이 어둠을 가르고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노아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환한 연회장의 중심에서 보던 얼굴과는 다른 얼굴이었다.
등불의 남은 빛이 옅게 내려앉아
그를 조금 더 조용해 보이게 했다.

“사람들 다 돌아갔습니까.”

“대부분은.”

그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나직이 덧붙였다.

“남은 사람은 두 사람뿐인 것 같군.”

“…소화도 있어요.”

“그럼 세 사람.”

나는 피식 웃었다.
웃었다기보다는
웃음을 가장해 숨을 고르는 데 가까운 표정이었다.

노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폭죽 소리는 멎었고
멀리서 들려오던 북소리도 사라졌다.
정원 바깥에서 들려오는 인력거 바퀴 소리만이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약속을 지키러 왔다.”

노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말을 바로 이해했다.

그 약속.

“고백이라 하셨죠.”

“그래.”

“사랑한다는 말은 아니라 하셨고요.”

“그 말은… 마지막에 아껴두려고.”

“…아껴둘 만큼 값진 겁니까.”

“그대가 허락해 주면 그때 내어놓지.”

나는 등을 기둥에 기대고 고개를 들었다.

위로 쭉 늘어선 등불 사이로
달이 반쯤 잘려 보였다.

“그럼 오늘 하시겠다는 고백은 어떤 종류입니까.”

노아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했다.
그의 옆모습 위로
희미한 빛이 한 줄 내려앉았다.

“내가 떠났던 이유.”

가슴 한가운데가 뜨겁게 당겨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노아의 눈에
내 표정이 그대로 비쳤다.
놀람, 긴장, 그리고… 오래된 상처.

“…떠나셨던 이유가 저와 관련이 있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질문은 처음으로 입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몇 년 동안 마음속에서만 빙빙 돌던 말.

‘나 때문에 떠난 건가.’
‘아니면 나와 상관 없이 떠난 건가.’

둘 중 어느 쪽이든
나에겐 잔인한 답이었다.

노아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흔들지도 않았다.
대신 그냥 솔직하게 말했다.

“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이 오늘 들은 어떤 축사보다
훨씬 더 크게 가슴을 쳤다.

“좌의정 댁의 대를 이을 사람은 원래 내 아버지였다.”

노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무 일찍 떠나셨지.”

나는 그 말만으로도
이 집안의 오랜 이야기들이
어렴풋이 그려지는 듯했다.

좌의정 댁의 기둥이 되어야 했던 사람
그 사람 대신
아직 어린 손자가 앞으로 밀려 나온 이야기.

“할아버지는 일찍부터 내가 기둥이 되길 바라셨다.”

노아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가문을 지키는 건 혼자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니까.”

“혼례도… 그 힘 중 하나지요.”

내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는 짧게 웃었다.

“그래. 혼례는 늘 힘과 함께 다닌다.”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등불 몇 개가 아주 작게 몸을 흔들었다.

“ㅇㅇ아.”

그는 내 이름을 불렀다.
조금 낮게 아주 또렷하게.

“처음에 할아버지가 네 집안과 혼례를 맺겠다고 하셨을 때—”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꽤 마음에 들어 하셨다.”

“…누가요. 공자님께서요, 좌의정 대감께서요.”

“둘 다.”

그 말이 이상하게 가슴을 간질이는 듯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네 집은 중인이라 해도 도감과 도화서를 드나드는 집이다. 왕의 얼굴을 붓으로 그리는 집,
역사를 그림으로 남기는 집.”

그는 내 어릴 적 기억을 꺼내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양반들 눈에는 그중 어떤 양반보다 더 믿을 만한 집으로 보였겠지.”

아버지의 화실 문 앞에 걸려 있던 현판이 떠올랐다.

‘그림으로 천하를 남긴다.’

사람들은 그 문 앞을 지날 때마다
잠깐씩 고개를 들어 그것을 읽곤 했다.

“세력을 넓히는 혼례는 아니었지만 기록을 지키는 집과 맺는 인연이니 나쁘지 않다—
할아버지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하셨다.”

“…처음엔요?”

“그래. 처음엔.”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윤가 집안이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서련의 붉은 옷자락이
다시 머릿속에 스쳤다.

붉은 등불 아래서 웃던 얼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녀 쪽으로 돌리던 눈길들.

“윤서련 아씨의 집안이요.”

“그래.”

“그래서… 혼례 상대를 바꾸라고 하신 겁니까.”

노아는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담담했다.

“좌의정 댁의 기둥은 흔들리면 안 된다고 하셨다.”
“윤씨와 혼인을 맺으면 내가 조정에서 버틸 자리를
더 단단히 만들 수 있다…할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셨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나는?

내 이름은
그 계산 속 어디에 있었을까.

“그래서… 저를 버리라고 하신 거군요.”

내 말이 너무 날카로웠는지
나 스스로도 놀랐다.

노아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약간 어두워졌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는 조용히 말했다.

“…거절했다.”

“거절했다고요.”

“그래서 유학길에 올랐다.”

바람이 한 번 세게 지나갔다.
등불이 일제히 흔들렸다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청국으로 유학을 갔다는 것도
사람들 말을 통해 들었다.

하지만 그 앞에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건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럼… 공자님은 윤가와의 혼례를 거절하기 위해
청국으로 가신 겁니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그러면요?”

“윤가와 혼례를 맺지 않고도 좌의정 댁을 지킬 방법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는 혼례로 힘을 빌리는 사람이 되기 싫었다.
그대와의 약조를 버리면서까지 힘을 얻는 사람은
더더욱 되고 싶지 않았다.”

“…….”

“그래서 떠났다. 내가 직접 힘을 만들어와 보여주고 싶었다. 윤씨가 아니어도 이 집안을 이끌 수 있다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문장 하나하나는
듣기에 그럴듯했다.

좌의정 댁의 후계자로서.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하지만 정작
그 말 사이 빈 곳엔
내가 없었다.

“…그런데 왜 저에게는 한마디도 안 남기고 떠나셨습니까.”

노아의 눈이
한 번 더 깊어진 듯했다.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왜, 저에게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와의 약조를 지키고 싶어서 떠나셨다면서요.”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떠날 때, 편지 한 장 남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바람 소리만
마루 밑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때 너무 젊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겁이 났다.”

“무엇이요.”

“내가 떠난다고 말했을 때 그대가 울면 어쩌나.”

나는 숨을 삼켰다.

“그대가 붙잡으면— 나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날아온 화살처럼
가슴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래서 저는 버려진 겁니까.”

나는 조용히 물었다.

노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버린 적 없다.”

“버린 적이 없다면서 떠났고, 버린 적이 없다면서
한 번도 소식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내 말이 점점 가늘어졌다.

“공자님은… 혼자서 ‘지킨다’는 말을 참 쉽게 하시는군요.”

나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하나 남겨두고, 혼자서 떠나서 혼자서 결심하고 혼자서 고생하고 혼자서 다 이겨낸 다음에—

다시 돌아와

‘지키고 싶었다’고 말하는 거죠.”

노아는 한 발짝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러나지도 않았다.

마치 그 거리를
스스로 벌로 여기고 있는 사람처럼.

“…맞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렇게밖에 할 줄 몰랐다.”

“그대가 울면, 떠날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정작 떠나고 보니 그대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연못 쪽에서
가느다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고백이다.”

노아의 목소리가
다시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는 그대를 지키겠다고 떠났지만 실은 그대를 가장 크게 다치게 만들었다.”

그의 손이 서서히 움직였다.

손끝이 내 쪽으로 뻗어왔다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닿지 않은 거리.
그러나 분명히 닿아 있는 마음.

“그게 오늘 내가 하려던 고백의 첫째다.”

나는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봤다.

눈앞의 얼굴이 낯설었다.

늘 웃고 늘 장난치고
늘 여유로운 얼굴 뒤에

이런 그림자가 숨어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그의 고백은 아프게 닿았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끝내 말해지지 않았다.

나를 지키려 떠났고 나를 다치게 했고
그래서 돌아왔다 까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 모든 말들 사이 가장 알고 싶은 한 가지는 결코 직접 말해주지 않았다.

정말로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지금의 ‘나’가 맞는지.

그 오랜 공백 끝에도 그가 선택한 사람이 과연 ‘나’인지.

확신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입술을 먼저 밀어 올렸다.

"..혼례는 누구와 하시려고요.”

대답을 알고 싶은 동시에
듣기 두려운 질문.

노아는 한 번도 웃지 않고 말했다.

“이미 정해져 있지 않나.”

그의 눈이 곧장 나를 향했다.

“한 번 정혼을 맺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바람이 불었다.

연못 위 등불 몇 개가
마지막 남은 힘으로 떨렸다.

“좌의정 댁에 윤씨와의 혼례를 밀어붙이려는 기운이
아직 남아 있는 건 사실이다.”

노아가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할 거다.”
“아니오.”

그는 아주 또렷하게 글자를 내뱉었다.

“내 혼례 상대는 이미 정해져 있다고.”

그 말은 어디에도 기댈 곳 없이 허공에 떠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허공과 똑같은 높이에
내 이름이 함께 걸려 있다는 것을.

“그대가 싫다 하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보겠다.”

그는 덧붙였다.

“그러니 이제 그대가 말해줄 차례다.”

“무슨 걸요.”

“그대가 나를 미워하는 이유.”

심장이 또 한 번 세게 내려앉았다.

“…그게 왜 궁금합니까.”

“사람은 보통 사랑한다는 말부터 꺼낸다.”

노아가 조용히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대가 왜 나를 미워하는지부터 알고 싶다.”

“왜요.”

“그 미움이 내가 그대를 떠날 수 없었던 이유와
닿아 있으니까.”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동자 속에
연못의 물빛과
등불의 마지막 잔향이 함께 비쳤다.

“그대가 나를 미워하는 만큼 나는 그대를 오래 생각해 왔다.”

숨이 막혔다.

말문이 막혔다.
심장도 생각도
모든 것이 한꺼번에 멈춘 것 같았다.

“오늘 밤의 고백은 여기까지다.”

노아가 손을 거두었다.

마루 위에 낮게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나머지는 그대가 나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을 때 말하겠다.”

“그때는…사랑한다는 말도 함께 내어놓을 수 있을지 모르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 내가 들은 말들과 듣지 못한 말들이
한꺼번에 가슴 안에서 부딪혔다.

좌의정 댁의 정혼자.
대감을 이을 후계자.

청국 유학.

그리고
나.

나는 서서히 손을 펴 보았다.
조금 전
노아의 손끝이 닿을 듯 말 듯 머물렀던 곳이
희미하게 뜨거웠다.

“……미워하긴, 미워하지.”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미워하는데—”

숨이 떨렸다.

“미워하면서도…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었으니까.”

말 끝이 조용히 떨어졌다.
부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깊은 곳에서 인정이 올라오는 듯했다.

달빛이 자리를 채웠다.

오늘 밤 나는
그가 떠나던 날로부터 멈춰 있던 시간을
조금 앞으로 밀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미워하는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끝까지 미워지지 않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마당 끝 연못 쪽에서
가느다란 물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등을 돌렸다.

오늘 밤의 고백은 절반만 끝났다.

나머지 절반을 들을 용기를
내가 언제쯤 갖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6화 달빛 아래 남은 자리 - 끝